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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할 수 없는 여성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3호 15면

로마시대 클라우디스 황제비 메살리나나 프랑스의 마르고 여왕은 역사 속의 유명한 색정광이다.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성욕으로 수많은 남성과 정사를 나눴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본인이 원치 않는데 신체적으로는 강한 성 흥분이 일어나 혼란스러운 여성도 있다.

부부의사가 쓰는 性칼럼

“저는 성에 환장한 여자 아니거든요.”
항변하듯 하소연하는 B씨의 눈가엔 눈물이 가득하다. 그녀는 그 어디에서도 병명조차 제대로 진단받지도, 치료된 적도 없다고 했다. 오히려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면 이상한 여자로 취급할 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가장 흔한 성기능 장애는 성욕 저하증이다. 즉, 성욕이 없고 별로 성행위를 원치 않는 여성이 많다. 그런데 B씨는 원치 않는 성 흥분이 나타나 주체할 수 없는 경우다. 어느 날부터 생긴 이 기이한 현상은 갑자기 성기와 그 주변부에 견딜 수 없는 흥분 반응이 생기고 이를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감에 사로잡힌다. 결국 성행위나 자위로 오르가슴을 겪고 나서야 증상이 좀 완화되지만 이도 잠시. 하루에도 몇 번씩 증상이 나타나서 당사자는 일상생활을 하기 무척 힘들다.

B씨가 겪는 문제는 바로 ‘지속성 성 흥분 장애(PSAS)’다. 원하는 성 흥분이라면 모를까, 엉뚱하고 원치 않는 성 흥분을 겪어야 하는 것은 당사자로서는 그야말로 힘든 일이다. 한마디로 ‘몸 따로 마음 따로’인 상태다. 별일이라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겪는 고통은 성기능 장애 중에서도 제일 심각한 축에 속한다.

흔히 여성의 성욕이 지나치게 과다해진 상태를 ‘님포매니어(Nymphomania-색정광)’라고 하는데, 이는 PSAS와 전혀 다른 얘기다. 님포매니어의 경우 스스로 강한 성욕을 보이며 남성과의 성관계에 집착하는 데 반해, PSAS 환자들은 성적 욕구가 없는 상태에서 성 흥분 반응이 반복되는 것이다. PSAS 여성 환자들은 무엇보다 신체 반응을 제어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성적 자극을 줘서 해소해야 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고통인 것이다.

지속성 성 흥분 장애의 원인은 성호르몬의 불균형, 음핵 및 성기로 들어가는 혈관이나 신경의 기형과 손상, 폐경기를 전후한 신체의 이상변화 등으로 본다. 학계에서는 강박적 불안증이나 경계선 인격 장애의 성적 불안, 조울증의 급성 조증 상태, 다양한 약물의 부작용 때문에도 일어난다고 본다. 이런 지속성 성 흥분 장애의 기전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성욕을 억제하는 약을 무턱대고 쓰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앞서 언급한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병을 다루는 지름길이라 하겠다.

지속성 성 흥분 장애는 삶의 과도기, 즉 성과 관련된 심신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특히 잘 나타난다. 이를 테면 성경험이 막 시작되거나 앞두고 있는 시기, 출산 직후, 폐경기 등 심신의 급격한 변화를 겪는 시기의 여성에게 흔하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에 색정광으로 불렸던 여성들 중 일부는 사실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 님포매니어가 아니라 지속성 성 흥분 장애로 어쩔 수 없이 방황했던 불쌍한 여성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지금처럼 성의학이 발달한 시대에 살았다면 역사도, 그들의 삶도, 평가도, 꽤나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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