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중도·친서민 정책 훼손 우려해 서둘러 결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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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의 사퇴 의사는 14일 오후 8시를 조금 넘은 시간에 청와대에 전달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오전 11시부터 9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대통령에 대한 첫 보고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인 오후 2시30분쯤 이뤄졌다. 이동관 대변인과 맹형규 정무수석, 정동기 민정수석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나온 천 후보자 관련 의혹을 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 참모들의 건의는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이 대통령은 “고위공직자의 처신은 다른 사람이 본받을 수 있도록 모범적이어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반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하지만 참모들의 격론 속에 나온 잠정 결론은 “하루 이틀 더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사실 확인을 위한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주장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온 청와대의 공식 반응은 “천 후보자와 관련된 의혹엔 유감스러운 내용이 많지만 확실한 위법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만큼 내정을 철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천 후보자의 내정이 ‘검찰 개혁을 위한 이 대통령의 야심작’이란 호평을 받았고, 마땅한 후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좀 더 지켜보자”는 청와대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제기된 의혹 일부가 오후 늦게 사실로 확인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대표적인 게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청문회에서 제기한 ‘채권자와의 부적절한 골프’ 의혹이었다. 박 의원은 13일 청문회에서 “천 후보자가 서울 신사동 아파트를 구입할 때 15억원을 빌려준 사업가 박모씨와 2004년 8월 골프채를 갖고 같은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는 기록을 확보했다”며 “두 사람이 함께 골프여행을 다녀온 증거”라고 주장했다. 청문회에서 천 후보자는 “2004년이 휴가철이어서 비행기에 한국인 단체관광객이 많았다. 박씨가 그 비행기에 함께 탔는지는 모르지만 같이 간 기억이 없다”고 부인했었다. 하지만 이날 오후 7시를 넘어서면서 두 사람이 골프여행에 동행한 게 사실이란 첩보가 청와대에 입수됐고, 민정수석실의 확인 결과 사실과 가깝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밖에 2탄, 3탄의 후속편들이 더 터져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청와대를 휘감았다. 이 대통령이 천 후보자의 내정 철회 결심을 굳히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민정수석 등으로부터 관련 보고를 받은 이 대통령은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천 후보자가 거짓말을 한 것 아니냐. 어떻게 민의의 전당인 국회 청문회에서 대놓고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란 취지로 실망감을 표시했다는 게 핵심 참모의 전언이다. 결국 “천 후보자를 보호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곧바로 천 후보자의 사의 표명이 이어졌다. 한때 천 후보자는 본인이 직접 해명을 하겠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교체 결심을 굳힌 청와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천 후보자의 자진사퇴 형식을 빌렸지만 사실상 이 대통령에 의한 경질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천 후보자의 처리 과정에서 보여준 이 대통령의 모습은 사람을 내치는 데 소극적이던 과거 전례에 비쳐볼 때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는 국민통합을 위한 근원적 처방 고심→중도강화론과 친서민 행보→재산 사회환원으로 이어졌던 이 대통령의 최근 행보와 따로 떼어내 생각하기 어렵다. 천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이 자칫 이 대통령이 가속화하고 있는 통합의 화두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고, 핵심 법안 처리를 앞둔 국회 상황을 악화시켜선 안 된다는 기류가 결국 천 후보자 사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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