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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내조의 여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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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한참 전의 자장면 배달원이 생각난다. 주말에 자장면 두 개를 주문했다. 늦어져서 밖을 보니 오토바이는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30분쯤 후 사우나 통에서 갓 나온 듯한 남자가 철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 걸어 올라왔다며 하는 말. “면이 불어 어쩌지요?” 감동이 넘쳐 가슴이 뭉클했다. 자장면 두 개를 들고 16층의 계단을 올라오면서도 면발 걱정을 했던 것이다. 자장면 가격에 두 배 되는 돈을 팁으로 주고 떡볶이만 한 면발의 자장면을 먹으면서도 불어터진 자장면이 그리 맛있을 수 있다는 걸 첨 알았다. 그는 프로였다. 난 내 직업에 대해 어떤 자세일까. 피자 배달원? 아님 자장면 배달원?

결혼한 여자는 전업주부와 취업주부로 나뉜다. 둘 다 경험해 보니 몸보다 맘이 더 괴롭더라. 전업주부라. 가사 노동은 ‘화폐로 환산할 수 없는 사랑의 행위’라며 멋지게 포장해 말들 하지만 반복되는 일에 무력감도 들고, 노력한 만큼 남편과 자식이 따라주지 못 했을 때 오는 허무함과 자책감도 있고, 집에서 혼자 하는 일이니 외로움도 만만치 않다. 취업주부는 취업의 이유가 경제적인 것이든 자아실현이든 간에 (대부분이) 생계를 책임질 만한 돈도 못 벌면서 ‘자식 내팽개친 독하고 이기적인 엄마’ 소리까지 들어가며 해야 하는 죄책감에 늘 시달리게 된다. 집에서 일을 하든 밖에서 하든 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만든다. 그 피자 배달원같이.

이혼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당신 없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 당신 일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일이야” 하던 사람이 막상 이혼하게 되니까 “네가 돈 한 푼이라도 벌어왔느냐. 집에서 놀고 먹었잖아” 하면서 위자료를 안 주려고 버티더란다. 그 말을 듣고 내가 한 말. 부인이 열심히 만든 떡을 남편이 밖에서 힘들게 팔아 돈을 벌었다면 떡 판 돈 누구 것? 가사 노동이 없었다면 남편들이 맘 편하게 밖에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가사 노동도 개인 노동이 아니라 사회 노동인 셈이다.

시대가 변했다. 요즘은 부부의 재산분할 청구권이란 것이 있어 가사 노동을 제대로 인정해주려 하고 있다. 주부가 놀고 먹은 게 아니라는 걸 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거다. 열심히 내조한 주부들, ‘내조의 여왕’ 대접 받으려나 보다.

앞으로는 원하든 원치 않든 평생을 전업주부로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각각이 처한 환경이나 취향, 출산 시기에 따라 직장과 가정을 넘나들며 살게 될 텐데. 직장일, 가정일, 어떤 일이든 맘 편히 일할 환경이 제공되고 자기 일에 대한 프로정신이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그 피자 맨이 구겨진 박스를 들고 불행한 얼굴로 방황할 때, 그 자장 맨은 은빛 통을 들고 지금도 행복하게 계단을 오르내릴 것이다.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