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충처리인 리포트

툭하면 ○○대란·△△대란 … 언론이 중심 잡아주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0면

“한국 신문을 보면 금방 큰 난리가 날 것 같아요. 웬 ‘대란’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겁니까. 크고 작은 대란들을 단기간에 겪고서 어떻게 나라가 견딜 수 있는지 신기합니다.”

얼마 전 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한 독자가 전화를 걸어 올 들어 각종 대란과 관련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며 던진 말이다. 그는 “한국보다 경제상황이 좋다고 볼 수 없는 미국에서도 대란에 해당하는 말을 미디어에서 잘 쓰지 않는다”며 괜한 불안감을 부추길 수 있으므로 국내 언론도 과도한 표현은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올해는 유난히도 ‘OO대란’이란 말이 자주 떠돌아다녔다. 1월엔 경기침체로 고용률이 떨어지고 실업률이 치솟자 취업 대란을 전망하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손님이 줄어 문을 닫는 가게가 속출하면서 자영업자 대란이란 말도 나왔다. 올 3월엔 국내 증시에 투자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철수할 것이란 뜬소문과 맞물려 ‘금융 대란’이 올 것이라며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 5월엔 화물연대의 운송거부 사태 속에 물류 대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예고된 대란’은 더 이상 대란이 아니었다. 대란이라고 부를 정도로 심각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란설에는 양면성이 있으며 통상 시장에서 만들어지고 소멸된다. 실체가 없는 불안심리를 확산시켜 상황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부작용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정부는 대란설이 돌면 행정력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진화에 나선다. 그러나 꼭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것이 시장참여자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미리 알리고 이에 대비하도록 각성시킨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대란설이 떠돌 때마다 결국 설은 설로 끝난 예가 많았다. 예고된 재앙은 그만큼 준비가 뒤따랐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세상사가 다 그렇듯이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걸핏하면 대란설이 불거져 나온다거나 별일도 아닌데 대란설로 포장된다면 시장엔 내성이 생겨 어지간한 일에는 무감각해지고 그 의도가 의심 받을 수도 있다. 소문을 퍼뜨린 주체의 신뢰가 흔들리게 됨은 물론이다.

6월 들어선 7월 1일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해고 대란’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정규직법이 시행에 들어갔지만 정부와 여당이 공언한 해고 대란설은 아직 현실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해고 대란설은 법 시행의 유예를 관철하기 위한 엄포용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논란이 거세지자 해고자가 순차적으로 늘어날 것이므로 이 시점에서 대란설의 진위를 판단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반박이 나왔다.

물론 해고 대란설은 문제가 잠복해 있어 아직 표면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일자리 돌리기에 따른 통계상의 착시 효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미리 경고함으로써 사태 발생을 막고, 문제가 조용히 수습되도록 유도하는 측면도 있다.

어쨌거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란설 파장이 잦아들고 있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장 소문을 잠재워야 할 정부가 신중치 못하게 처신했다는 비난을 피하긴 어려울 것 같다.

서울 서초동의 김부선씨는 “비정규직법이 국회를 통과한 건 2년 전이므로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것 아니냐. 해고 대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준비를 했어야 할 정부와 정치권이 대란설 운운한 것은 무책임한 자세”라며 “중앙일보가 이런 점을 잘 지적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명수 고충처리인, 일러스트=강일구


고충처리인은 언론 보도로 인한 피해 예방과 자율적 구제를 위해 일하고, 독자 의견을 전달하는 창구입니다. 전화 02-751-9000, 080-023-5002 팩스 02-751-5176 e-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