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린 뒤 관객 70%가 남았다, 오태석 만나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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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객은 진지했다. 한국 극작가 겸 연출가인 오태석(69·사진)씨의 연극 ‘태(胎)’가 일본 도쿄 세타가야 공연장 무대에 오른 10일 오후 7시. 객석은 2층까지 발디딜 틈이 없을만큼 빽빽했다. 80분간의 공연은 적막함 그 자체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관람하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가 이번 연극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막이 내리자 뜨거운 박수가 한동안 계속됐다. 흥미로운 건 공연 이후였다. 관객의 70% 가량이 자리를 뜨지 않고 이어지는 오태석 연출가와의 대화에 참여했다. 마치 학술 세미나를 방불케했다.

#한국인의 원형적인 생명 의지

도쿄 세타가야구는 한국으로 치면 서울 서초구에 해당하는, 부유층이 많이 사는 동네다. 복합 쇼핑몰 2층에 위치한 세타가야 극장은 600석 규모의 중형 극장이지만 실험적인 작품을 잇따라 올리며 일본 현대 연극의 새로운 메카로 급부상중인 공간이다. 이곳에 한국 ‘국가 브랜드 공연’으로 지정된 연극 ‘태’가 초청받은 것이다.

작품은 조선시대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사건을 다룬다. 오태석 연출가는 사건의 세세함을 밀도있게 파헤치기 보다 종이옷, 먹물, 생략과 비약 등을 동원한 시적인 이미지들로 징검다리를 건너 뛰듯 작품을 끌고 갔다.

권력 암투의 최정점에서 작품은 공교롭게 새생명에 초점을 맞춘다. 삼족이 멸할 위기에 처한,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의 며느리는 세조를 찾아가 뱃속에 있는 아이만큼은 낳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세조는 “남자 아이를 낳으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주겠노라”고 말한다. 그는 아들을 낳고는 종의 자식과 맞바꿔치고 도망을 가게 한다. 그러나 이도 오래 못 가 발각되지만 세조는 “하늘이 내린 생명을 인간이 어찌 할 수는 없는 법”이라며 살려준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이어가는 한국인의 강인한 생명력을 작품은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인 여성 관객인 토모 쿠와노씨는 “자식을 내어 준 뒤 ‘창자야-’를 외치는 여종의 절규가 가슴을 저며오게 했다”고 전했다.

#공연은 관객이 만든다

1974년 초연된 연극 ‘태’는 왕권 찬탈 과정에서 빚어지는 비정한 살육을 다루면서도 생명의 끈질김을 보여줘 호평을 받아왔다. 10~11일 오후 일본 도쿄 세타가야 극장 무대에 ‘국가 브랜드 공연’으로 오른‘태’의 한 장면. 둥둥 떠다니는 삿갓 등 상징적 묘사에 일본 관객은 관심이 많았다. 오른쪽 앞쪽이 세조 역의 김재건, 가운데가 신숙주 역의 장민호 선생이다. [국립극장 제공]


공연이 끝난 뒤 오태석 연출가는 짧게 깎은 스포츠형 머리에 맨발로 무대에 올랐다. “우리 작품은 원래 심각하지 않다. 슬프지만 해학이 있다. 그런데 일본 공연이라 그런지 배우들이 더 긴장한 거 같다”며 겸손해했다.

질문이 빗발쳤다. 주로 연출 방식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배우들이 왜 맨발로 공연을 하는가”란 질문에 연출가는 “체중을 다리에 실어 내려보낸다. 맨발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땅속의 지력을 빨아들인다. 내려가고 올라가는 힘이 충돌할 때 가장 에너지가 높다”며 “헉!” 소리와 함께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다. 소리는 극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배우들이 앞을 보면서 연기하는 것도 궁금해했다. 오태석 연출가는 “공연은 관객이 만들어간다. 무대는 20%만 보여준다. 나머지 빈 공간은 관객의 상상력과 경험이 채워주는 것이다”라며 “이렇게 서로 소통하기 위해선 배우와 관객이 서로 마주 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연극 ‘태’의 해외 공연은 2007년 인도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다. 임연철 국립극장장은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면서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진 ‘국가 브랜드 공연’을 해외에 계속 내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도쿄=최민우 기자

◆국가 브랜드 공연=2006년부터 시작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물을 만들어낸다는 목표로 국립극단의 ‘태’, 국립무용단의 ‘춤 춘향’, 국립창극단의 ‘청’,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네줄기 강물이 바다로 흐르네’ 등 국립극장 산하 4개 국립예술단체의 작품들이 ‘국가 브랜드 공연’으로 지정됐다. 국립극장 측은 내년부터는 장르별로 흩어진 작품들을 하나로 통합해 집중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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