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게 VIP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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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호 15면

정식 병명은 아니지만 높은 지위에 있거나 재력가라고 해서 필요 이상의 요구를 하는 환자들의 진료 결과가 오히려 더 안 좋게 되는 상황을 의사들끼리 ‘VIP신드롬’이라고 칭한다. 의료진도 신이 아닌 이상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무리하다 보면 시술과 처방에서 실수하게 되는 수가 있다. 때로는 의사를 자신의 고용인쯤으로 생각해 처방마저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다 엉뚱한 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공인이기 때문에 본인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이 싫어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갖고 있으면서도 치료를 미루다 자살 등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이들도 역시 이런 VIP 신드롬의 희생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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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숨진 마이클 잭슨과 관련해서도 의사들을 상주시키고, 공연 기간에는 병원 수준의 기계와 약품을 갖고 다녔다는 뒷얘기들이 들린다. 마이클 잭슨의 호흡이 멈춘 순간 신고 전화를 한 주치의가 과연 어떤 약물을 처방했고 사망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추측해 볼 여지가 많다. 해 달라고 한다고 성형수술을 끊임없이 해 준 의사들이나, 수면제와 진통제를 함부로 처방한 잭슨의 마취과 전공 주치의들이 잭슨의 불행과 사망과 관련한 윤리적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도 같다.

솔직히 어디 가서 남보다 특별하게 대접받는 것 같으면 기분도 좋고 우쭐해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다. 무의식 속에는 누구나 왕자와 공주처럼 살고 싶은 퇴행의 정서가 숨어 있어 대중은 마이클 잭슨이나 다이애나비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의료 영역에서는 환자를 무조건 왕자와 공주처럼 대접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의학이란 합리적인 과학정신에 기반을 둔 전문 영역이기 때문에 전문가의 의견에 반해 떼쓰는 VIP환자에게 끌려다니다가는 마이클 잭슨처럼 잘못된 치료를 하게 될 가능성도 높다. 실제로 고가의 첨단 장비가 꼭 양질의 진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문진·청진·촉진·시진을 하면 충분히 잡아낼 수 있는 질병들을 의사의 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비싼 기계만 남용하다 오진하는 경우도 많다.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면 헛발질을 하게 되고, 귀한 수입품이나 제철 아닌 재료를 쓴 호화로운 밥상이 오히려 몸에는 해가 되듯, 돈만 쏟아붓는 사치스러운 의료보다는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표준화된 치료가 훨씬 더 건강하다.

미국과 같은 극단적 자본주의식 의료 시스템에서는 있는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처럼 죽을 수 있고, 없는 사람들은 힘든 병 한번 걸리면 파산해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반면, 영국식 사회주의적 의료체계에선 진료 대기 시간이 몇 달씩 되고 우수한 의료진이 유출되는 단점이 있다. 한국 역시 건강보험에 적용되는 진료를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게 되는 왜곡된 의료체계 때문에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는 성형수술, 피부미용 시술 등이 성행하고, 비싼 진단 장비가 남용되는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약과 기계의 남용 대신 환자의 면역성과 자아 치유력을 키워 주고, 아프고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힘쓰는 새로운 의료 모델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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