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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정보 국민과 공유한 일본, 국왕과 측근들만 돌려 본 조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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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1871년 11월 일본 요코하마의 부둣가에서 구미제국을 순방하기 위해 출항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배웅하는 행사가 열렸다.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가 낭독한 송별사에는 사절단의 성격과 목표가 잘 드러난다. “외국과의 교제는 국가의 안정과 위기에 관련되며 사절의 능력 여부는 국가의 영욕에 관계된다. 지금은 대정유신(大政維新), 해외 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때이니 그 사명을 만 리 떨어진 곳에서 완수해야 한다. 내외 정치, 앞날의 대업이 성공하고 못 하고가 실로 이 출발에 달려 있고 그대들의 대임에 달려 있지 않는가. 대사는 천부의 훌륭한 자질을 지닌 중흥의 공적이 있는 원로다. 함께 가는 여러 경들은 모두 국가의 주석이며 관원들도 한때의 인물들이다. 모두 이 훌륭한 뜻을 한마음으로 받들어 협력하여 직분을 다해야 한다. 나는 그대들의 뜻이 실현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안다. 가라! 바다에서 증기선을 옮겨 타고 육지에서 기차를 갈아타며, 만 리 각지를 돌아 그 이름을 사방에 떨치고 무사히 귀국하기를 빈다.”

사절단을 이끈 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그림 가운데 작은 증기선의 일본옷 입은 사람)와 부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자 귀국 후 정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실세들이었다. 이들은 정부 각 부서의 중견 관리 41명과 유학생 43명 등 100여 명을 이끌고 장도에 올라 1872년 9월까지 1년10개월 동안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독일·러시아·이탈리아·스위스 등 구미 선진국의 문물과 제도를 둘러보았다. 사절단이 거둔 성과는 사절단을 따라갔던 역사가 구메 구니타케에 의해 총 5권의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라는 책으로 활자화, 출판돼 국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되었다. 그가 “사절의 모든 성과를 국민의 일반적 이익과 개발을 위해 편집·간행”한다고 책머리에 썼듯이, 천황이 아니라 바로 국민을 대표한다고 생각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자신들의 경험을 국민과 함께 나누었다.

10년 뒤 일본을 따라 배우려 했던 조선의 조사시찰단(1881년 5~8월)은 그들이 거둔 성과를 담은 80여 권의 보고서를 고종에게 올렸다. 그러나 붓글씨에 능한 아전들이 두 달에 걸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손으로 쓴 비단 표지를 입힌 이 책들은 국왕과 일부 위정자들의 정책결정용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았다. 한 세기 전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근대를 향한 ‘시간의 경쟁’에서 우리가 뒤처진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자명하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