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20조 넘게 쌓인 유휴설비 녹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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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대전에 있는 A기계는 최근 7억5천만원을 받고 기계부품 가공설비를 필리핀에 팔았다.

1년전 일본에서 25억원에 들여온 것을 감안하면 값이 30%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L사장은 "일감이 없어 놀리다 고철이 될 것 같아 밀린 직원봉급이라도 주려고 헐값에 넘겼다" 면서 "10년 이상 쓸 수 있는 기계로 예전 같으면 15억원은 쉽게 받았을 것" 이라며 아쉬워 했다.

그나마 이 회사는 운이 좋은 경우다. 40여 기계 유통상들이 모여 있는 서울남영동의 한 창고에는 선반.밀링기.프레스기 등 1백대 이상의 중고기계들이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쌓여 있다.

모두 매물로 나온 것이지만 언제 팔릴지 기약도 없다. 대창기계상사 홍석진 사장은 "기계를 팔겠다는 전화는 많지만 찾는 사람이 없어 두 달여 동안 한 대도 못 팔았다" 고 하소연했다.

유휴설비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수입업체가 부도나는 바람에 포장도 뜯지 않은 수입품이 보세창구에 쌓여 있고, 부도나거나 가동률을 줄인 업체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중고설비가 늘고 있지만 사겠다는 사람은 없어 고철로 팔려 나갈 위기를 맞고 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최선일 처장은 "특히 비싼 값에 들여왔던 외국산설비가 수입가는 물론 국제시세에도 훨씬 못 미치는 헐값에 팔려 나가고 있다" 면서 "국부 (國富) 유출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 고 지적했다.

중소기업은행 선석근 차장은 "담보로 잡은 설비들이 안 팔려 고철로 팔아넘기는 경우가 많아 손해가 크다" 고 말했다.

◇현황과 문제점 = 정확한 산출은 어렵지만 정부기관.업계가 추산하는 유휴설비 규모는 최소한 20조원. 중소기업진흥공단에 따르면 성업공사가 약 4조원, 리스업계와 산업.중소기업은행 등 금융기관이 각각 3조원씩 모두 10조원 상당의 공장설비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유휴설비와 대기업들이 내놓은 플랜트.선박이 최소 10조원어치에 이른다는 것. 이는 최소한으로 잡은 것이고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종류도 선반.밀링기 등 기계류를 비롯해 건설 중장비.각종 계측기.컨베이어시스템과 같은 소형 플랜트 등 각양각색이다.

워낙 불경기다 보니 사겠다는 곳이 없는 데다, 대부분 공장저당법에 따라 토지.건물과 함께 일괄담보로 잡혀 있기 때문에 필요한 설비가 있어도 불필요한 토지.건물까지 함께 떠안아야 해 더욱 매매를 어렵게 하고 있다.

중개상이 있지만 영세해 미리 사 놓을 만한 자금력이 취약하고 영업력도 부족해 취급품목이 공작기계.밀링기 등 일부에 국한된 실정. 수출도 쉽지 않다. 중고설비는 무역금융.수출보험 대상에서 제외돼 있는 데다 외국바이어들도 최근 환율이 떨어지자 발길을 돌리고 있다.

설비수출업체 CNCE의 이인철 사장은 "바이어들이 한국의 급한 사정을 알고는 턱없이 낮은 가격을 부르기 일쑤" 라면서 "고철로 썩힐 수 없어 헐값에나마 팔고 있다" 고 말했다.

지난해말 이탈리아로부터 수입된 4천만달러 상당의 제강설비가 수입업체의 부도로 포장도 뜯기지 않은 상태에서 야적장에 방치돼 있는 일도 있다.

◇대책 = 산업연구원 (KIET) 양현봉 박사는 "5년간 7조원 가량이 투입된 중소기업 구조개선자금을 유휴설비 활용업체에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산업자원부는 ▶대규모 설비유통단지 조성▶유휴설비 매매사제도 도입 ▶설비 유지.보수업자 지원대책 등이 포함된 '중고설비 거래촉진법' 제정을 추진중이다.

이밖에 기계공업진흥회에 '유휴설비정보화센터' 를 만들어 정보교환 등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강구중이고 중진공은 매매를 제도적으로 알선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다.

서경엔지니어링 민경식 사장은 "설비의 분리매각이 가능토록 공장저당법을 개정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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