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미국인의 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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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디펜던스 데이' '딥 임팩트' '아마겟돈' - .지구의 위기를 다룬 영화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엄청난 제작비를 들이고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관객동원에 짭짤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미국인이지구를 구원한다는 것이 내용상의 공통점이다.

냉전에 승리하고 세계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의 위상이 한껏 부풀려져 있다.

뛰어난 자본력과 기술력이 악과 재앙에 대항해 인류를 지켜주는 미국의 밑천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힘만으로 위기를 넘기지 못하는 한계점에서 기적을 불러오는 묘약은 동료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휴머니즘이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불굴의 개척정신이다.

'아마겟돈' 에서 석유채굴업자를 영웅으로 내세운 건 맞춤한 선택이다.

자본력과 기술력, 그리고 개척정신을 고루 갖춘 직업으로 더 나은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휴머니즘을 이 직업에 갖다붙이는 것은 수월찮은 일이었던 것 같다.

애비보다 애인을 딸에게 남겨주는 편이 좋겠다는 갸륵한 결단도 어색하지만, 부녀간의 마지막 통화를 위해 인류의 운명을 스톱시켜 놓고 관객을 감동시키려는 노력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영화들이 그리는 인류의 위기가 외계인이나 소행성 등 외부의 것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현실 속에서 높아지고 있는 인류의 위기의식은 바로 맹목적인 개척정신으로 자본력과 기술력을 무절제하게 휘두르는 데서 오는 환경문제에 있지 않은가.

역사학자 거셴크론은 후진국의 독재자가 내부의 모순을 호도하기 위해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과장하는 패턴을 설명한 바 있다.

냉전이 끝난 후에도 인종문제.종교문제 등으로 대외적 긴장을 고조시키려는 경향이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거듭 수긍이 가는 설명이다.

얼마 전까지 북풍이 몰아치던 이 나라에 이제 햇볕정책이 자리잡아 가는 것은 후진국 정치행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반가운 징조다.

뛰어난 자본력과 기술력으로 만든 웅장한 화면 위에 내부의 문제를 외부의 위협으로 덮어버리는 프로퍼갠더가 더 큰 스케일로 펼쳐진다.

세계정복에 나선 유럽인이 인류를 야만으로부터 구원하겠다고 내세운 '백인의 짐 (White Man's Burden)' 이 바로 19세기 휴머니즘의 기조였다.

할리우드가 내세우는 '미국인의 짐' 에서는 그만한 휴머니즘의 냄새도 안 난다. 그래도 '짐' 얘기 하는 걸 보면 뭔가 정복에는 나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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