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빌라도의 예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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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예수
정찬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419쪽, 1만원

외국 문학작품을 들여오는 한편 국내 작가들의 훌륭한 작품을 적극적으로 수출하겠다는 취지로 설립된 랜덤하우스중앙이 그 첫작업으로 소설선 출간을 시작했다. 첫번째로 선택된 작품은 정찬(51·사진)씨의 새 장편소설 『빌라도의 예수』이다.

이 소설이 극복해야 할 어려움은 여러가지다. 우선 빌라도라는 인물이 우리와 친숙하다는 점이다. 자라면서 교회 주변을 한두번쯤은 기웃거리게 되는 한국적 현실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이어지는 ‘사도신경’은 친숙하다.

로마제국의 유대 총독으로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장본인 빌라도가 실은 예수의 처형에 반대했다거나 석방하려고 애썼다는 대목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다. 신의 아들 예수에 맞서 인간 이성(理性)의 가치를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구도라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과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등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이 작품 속 빌라도는 『사반의 십자가』와 혈맹당원 사반이나 『사람의 아들』의 악마적 존재인 아하스 페르츠와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400쪽이 넘는 분량도 조금 부담스럽다. 『빌라도…』는 2002년 장편소설 『광야』를 펴낸데 이어 지난해 소설집 『베니스에서 죽다』를 출간하는 등 부지런하게 작품활동을 해 온 정씨가 “징글징글하게 썼다”고 밝힌 작품이다.

소설의 실마리는 소재 빈곤으로 고민 중이던 소설가 화자가 친구의 도움으로 떠난 유럽 여행에서 스위스 중부 도시 루체른에 있는 필라투스산을 오르며 풀린다. 필라투스산은 폰티우스 필라투스, 곧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고 괴로워하다 만년에 참회하기 위해 숨어들었다는 산이다. 현지 한국인 여행 가이드는 2120m 높이의 험준한 바위산 어딘가에 빌라도가 기거했던 기도원이 남아 있다고 귀띔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소설가 화자는 『유대 고대사』와 『유대 전쟁사』 등 역사서와 인터넷을 통해 빌라도에 관한 자료를 모으다가 빌라도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는 점을 발견한다.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빌라도를 ‘의지가 강하고 권위주의적이면서도 합리적이고 실제적이며 자신의 역할을 어느 지점에서 거둬들여야 하는지를 잘 아는 인물’로 기록했다. 반면 인터넷에 떠도는 풍설들은 그를 ‘필라투스산 정상에 살았던 악령’‘폭풍과 지진을 일으키는 악마 군단의 우두머리’로 전한다.

소설가 화자가 등장하는 짧은 앞부분을 제외하고 소설은 철저하게 빌라도의 입장에서 기술된다. 변수와 함정투성이인 로마 중앙 정치무대에서 연줄을 잡아 살아남은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도정에 기독교와 예수의 실체, 기독교 발생의 뿌리를 캐들어가는 과정이 소설의 전체적인 얼개다. 로마인 빌라도는 신의 실재를 의심하고, 신을 인간의 탁월한 상상의 산물로 생각한다. 전설대로 말년에 필라투스산으로 흘러든 것으로 그려지지만 끝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빌라도의 그런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가 빼곡히 등장한다.

동정녀 수태와 죽음 이후 부활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이전 이집트 종교에 이미 존재했다는 비교종교학적 자료가 제시되고, 수련을 통해 3일간 가사(假死) 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난 의학 사례도 소개된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한 기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창세기로 시작하는 ‘모세오경’이 강력한 이스라엘 통일국가를 다지기 위해 창조된 민족 서사시라는 주장도 거론된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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