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낭만적 사랑과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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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문학과 지성사, 251쪽, 8000원

<본문 9~12쪽>

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

고무줄이 헐렁하게 늘어나고 누렇게 물이 빠진 면 팬티는 말하자면, 나의 마지막 보루다. 상우의 입술은 내 귓불에 닿아 있었다. 여자가 감질날 정도를 정확히 계산한 듯 살짝살짝 입김을 불어넣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내 상반신을 내리누른 그애의 어깨 너머 60인치 와이드 화면 속에선 브래드 피트가 권총을 뽑아 드는 중이었다. 리바이스 청바지에 감싸인, 착 올라붙은 브래드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나는 언제 몸을 떼어야 좋을지 가늠해보았다. 그애의 손가락은 그러나 내 대퇴부를 살살 쓰다듬을 뿐 팬티 라인은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고수의 솜씨였다.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았다.

남자애와의 데이트가 대부분 그렇듯 오늘도 베니건스에서 샐러드와 파스타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나니 특별히 갈 곳이 없었다. 상우가 “비디오방이나 갈래?”했을 때 나는 “글쎄……” 하며 얼버무렸지만 결국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얌전히 앉아 비디오를 보던 그애가 입술을 부딪쳐왔을 때 나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키스할 때 눈을 뜨는 건, 나 바람둥이야, 라고 광고하는 일이다. 그러나 첫 키스에서 여자가 너무 적극적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새침한 척, 입술을 아주 약간만 벌려주었다. 상우의 입맞춤은 능수능란했다. 민석이처럼 무작정 냄새나는 혓바닥을 쑥 밀고 들어오지도 않았고, 승재 오빠처럼 (1)'상대의 입술을 벌린다; (2)'혀를 집어넣는다; (3)'서너 차례 회전시킨 다음 상대의 혀를 핥기 시작한다, 는 식의 매뉴얼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변죽만 울리다 말지도 않았다. 상우의 입술은 뭐랄까, 우유에 적신 스펀지케이크처럼 촉촉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적당한 완력마저 느껴졌다.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상우가 혀를 움직이기 좋도록 입술을 조금 더 크게 벌려주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내 정신이 잠시 혼미해진 틈을 타 상우의 손이 불쑥 스커트 아랫자락을 헤치고 들어온 것이다. 가슴2)을 건너뛰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는 무릎과 무릎 사이를 오므렸다. 침착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러는 거 싫어.” “따뜻해서 그래. 조금만 이렇게 있을게.” 상우가 귓가에 속삭이자, 허벅지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더 이상은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그러나 상우는 서울에서 제일 좋은 대학의 의대생인 데다 잘생기기까지 했다. “아이 참, 나 이런 거 싫은데. 그럼 딱 거기까지만이야!”귓가에 부서지는 입김이 점점 거칠어진다 싶더니, 마침내, 브래드 피트가 권총을 발사한 찰나, 상우의 손이 천천히 상승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애의 손가락은 점점 내 팬티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 팬티! 삼 년 동안 줄기차게 입어온, 양은솥에 넣고 푹푹 삶아댄, 누리끼리하게 변색된, 낡은 팬티! 팬티를 사수하는 것은 세상을 사수하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안으로 삼키고 상우의 손을 쓱 잡아 뺐다. 내 몸 위에 엎어진 남자애의 어깨를 밀어내고 꼿꼿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더 이상은 안 돼!” “왜 안 돼? 너도 좋잖아?” 혹시 팬티 속의 습기를 눈치 챈 건 아니겠지? 움찔 놀랐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15도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첫번째 레퍼토리를 사용할 시점이 예상보다 빨리 온 것이 아쉬웠으나, 지킬 건 지켜야 했다. “오늘은 안 돼. 우린 이제 겨우 두번째 만나는 거잖아.” 단어의 갈피갈피마다 머뭇거리며 “아직은, 아직은, 서로를 자알 모르잖아.” 길고 미지근한 여운을 남겨야 한다. 상우는 곧 자신의 조급함을 사과하고 내 어깨에 얌전히 팔을 둘렀다. 이만하면 매너도, 머리 회전도 괜찮은 녀석이었다. 나는 살며시 그애의 팔에 머리를 기대주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열한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냥 헤어지기에도, 또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기에도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오늘이 우리의 두번째 데이트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역시 욕망의 절제가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짐짓 과장된 동작으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어머, 큰일났네. 통금 시간 다 되어가잖아.” “너 그런 것도 있어?” “응. 우리집이 좀 엄한 편이거든.” 상우는 곧 택시를 잡아 세우더니, 깍듯하게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한숨이 나왔다. 데려다주지도 않을 거면서, 차비를 내주지도 않을 거면서 덜컥 택시부터 잡다니. 차에 오르며 흘낏 얼굴을 쳐다보니 상우는 스스로의 신사도에 매우 만족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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