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인질의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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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혹시라도 북에 가족이 있다는 말일랑 말아라. " 21년전 아버지는 기자가 된 나에게 맨먼저 걱정스레 말씀하셨다.

술에 취하면 늘 '나그네 설움' 을 부르시며 눈물 짓던 아버지에게서 연좌제의 그림자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남북대치 상황에서 생겨났던 '인륜의 사슬' 연좌제는 마침내 제5공화국에서 그 족쇄가 풀렸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는 '연좌제 사회' 에 머물고 있다.

다만 '이념의 인질' 에서 '자본의 인질' 로 바뀌었을 뿐. '자본의 인질' 이 '이념의 인질' 보다 더욱 악랄한 것은 최소한의 애틋한 인간관계마저 파괴해 버린다는 데 있다.

최근 처가의 빚보증이 잘못돼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렀다며 이혼한 아내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했다가 기각된 사건이 있었다.

친정어머니 빚에 연대보증을 섰다가 부채를 떠맡게 되자 가정불화가 일어나 갈라서게 된 부부였다.

일전 한 모임에서 이 얘기가 나오자 모두들 "우리나라 가정 치고 보증 한 건 없는 집은 없을 것" 이라고 입을 모았다.

"건설회사 하는 형부네 보증을 남편이 서 줬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서울 동부이촌동 집도 날리고, 월급도 차압이 들어와 반밖에 못 받고 있어요. 시부모댁에 얹혀 사는데 친정일이어서 더 눈치가 보여 바늘방석입니다. "

"남편 형님이 가계대출로 1천만원을 빌리는 데 보증을 서 달라고 했대요. 부인은 그것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친구에게도 3천만원 보증을 서 줬다가 그 친구가 해고당해 돈 갚으라는 쪽지가 날아 오며 부부싸움 끝에 가정이 파탄나 버렸어요." '보증' 이 화두가 됐던 이날 얘기는 "인테리어회사를 하다 부도가 나서 전재산을 날리고 부모댁에 들어가 사는 이가 '다 망했지만 보증 서달라는 말 안 듣고 사니 차라리 속편하다' 고 하더라" 는 말로 끝이 났다.

옛말에 '빚보증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 고 했다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형님.동생.처가.친구.직장동료.학교 선후배…. 단일민족의 끈끈함으로 얽혀 있는 우리 민족, 그래서 마우스 하나로 전세계와 교신하는 이 첨단시대에도 지역감정의 골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칼로 무 썰듯 인정의 고리를 잘라 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돈을 꿔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름 석 자 빌려 달라는데 야멸차게 대했다가는 단박에 '인간성' 을 비판받기 십상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보증인을 요구하는 제도가 존재하는 한 누구든 '잠재적 인질' 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미국에서는 세금납부는 물론 집세.전화요금.수도요금 등을 밀리지 않고 납부했는지까지 모두 체크돼 신용정보회사의 개인별 신용점수가 더해지거나 깎인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대출이나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 하면 해당 금융기관에서 곧바로 신용정보사에 그의 신용상태를 알아보고 대출이나 신용카드 발급여부와 한도.이자율 등을 차등적용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5백만엔 미만의 소액대출인 경우 보증인 1명을 세우지만 5백만엔 이상인 경우 보증인을 세울 필요 없이 은행이 신용보증회사에서 개인신용도를 조사해 대출여부를 판정한다고 한다.

한 재일한국인부부는 3천만엔을 융자받아 집을 샀지만 대출기관은 보증인은커녕 그 집조차 담보로 하지 않았다. 신용보증회사가 책임을 진 까닭이다.

우리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목줄을 죄지 않고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는 없을까. "10여년 가까이 집안끼리도 친하게 지냈는데 미안함 때문인지 완전히 벽을 쌓아 버리더군요. 돈도 돈이지만 인간관계가 다 끝장나 버려 더욱 안타깝습니다. "

사업관계가 있어 거절 못하고 연대보증을 서 줬다가 1억원을 물어냈다는 K씨는 '돈 잃고 사람 잃는 보증을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 고 탄식했다.

행정전산망과 금융전산망도 가동됐다.

관계기관에서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개인의 신용정보화가 가능한 시점이다.

서로 눈치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힘든 세상, 그 속에서라도 서로에게 '심리적 인질' 이 되지 않고 가난한 마음이나마 의지하면서 살아 갈 수 있도록 보증제도의 재검토가 이뤄졌으면 한다.

홍은희(생활과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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