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의 FUNFUN LIFE] 비만 오면 설렌다, 나의 사랑 나의 장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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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여 동안 사 모은 장화들.

장화가 좋다. 맞다. 그 비 오는 날 신는 고무 신발 말이다. 비 오는 날도 좋다. 비 오는 날이 좋아서 장화가 좋은 건지, 장화가 좋아서 비 오는 날이 좋은 건지, 어쨌든 나는 비도 장화도 좋아한다.

내가 처음 장화를 산 건 5년 전쯤이다. 인터넷을 뒤지다 해외쇼핑몰에서 본 녹색 장화에 꽂히고 말았다. 워낙 녹색 계열을 좋아하는 터라 그걸 본 순간 덥석 사버렸다. 그 튀는 녹색을 언제 신으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질러버렸다. 그걸 사고 난 뒤 어찌나 비 오기만을 기다렸는지…. 비를 기다리는 농부들과 같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비 오는 날이면 나는 그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약속이 없으면 동네 한 바퀴라도 돌았다. 그런데 내겐 장화 징크스가 있다. 비가 와서 장화를 신고 나가면 비가 그친다. 그것도 금세 해가 쨍쨍 날 정도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믿고 장화를 신고 나갔다가, 화창해지는 바람에 발이 민망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비를 싫어하는 친구들은 비가 오면 나한테 전화를 걸어 말한다. “얘! 오늘 장화 좀 신고 나가라.” 그래서 장화를 신은 날에는 구두도 챙겨서 나간다. 그런데 또 잘 챙겨 나간 날은 비가 잘 안 그친다는 거.

어쨌든 나는 장화가 좋아서 색깔별로 사 모았다. 베란다에 늘어선 장화를 보면 흐뭇할 뿐이고…. 이 장화를 열심히 신어주려다 보니 시냇가가 있는 교외로 나갈 때도 장화를 신는다.

그런데 나만큼 장화를 잘 신는 사람들을 미국 뉴욕에서 떼로 만났다. 지난달에 일 때문에 뉴욕에 갔는데, 뜻밖에도 거리에는 고무장화를 신은 사람들로 넘치고 있었다. 게다가 신발가게마다 어쩌면 그리도 예쁘고 튀는 장화들이 많은지. 충동구매 의욕을 꺾느라 무지하게 노력했다. 이즈음의 뉴욕 날씨는 믿을 게 못 된다고 전해 듣긴 했지만 어찌나 종잡을 수 없던지, 오전에는 화창하다가 오후엔 비가 마구 쏟아지곤 했다. 아마 그래서 그런가 보다. 뉴요커들이 해가 쨍쨍한 날에도 태연하게 장화를 신고 돌아다니는 것은…. 뉴욕에 살았던 지인의 말을 들어보니 맨해튼엔 배수로가 작은 탓인지 비만 오면 거리에 물이 넘친단다. 게다가 뉴욕 거리엔 쓰레기와 개똥이 많아서 비만 오면 ×물이 되니 장화를 안 신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선진 도시에서 웬일?’ 싶지만, 전해 들은 이야기론 그렇단다. 나도 비 쏟아지는 뉴욕 거리를 보면서 집에 있는 나의 장화들이 생각났을 뿐이고.

지금이 장마철이란다. 나는 장마가 좋다. 그동안 대기시켜 놓은 장화를 신을 생각을 하면 혼자 신난다. 그런데 실은 살짝 고민이 있다. 우리나라에선 평범한 장화를 신고 다녀도 신기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많다는 거다.

언젠가 개그맨 송은이 언니와 점심을 먹다가 장화 얘기가 나왔다. 나보다 더 일찍 태어난 언니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 장화는 부잣집 얘들만 신고 다녔다고 했다. 보통은 운동화 하나로 생활하는데 부잣집 애들은 비 오는 날에는 따로 신는 장화 한 켤레가 더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비까지 갖춰 입은 애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단다. 어렴풋이 기억나긴 한다. 비 오는 날이면 노란색 장화에 노란 우비를 입고 오는 아이가 한 반에 한 명씩은 꼭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아직도 장화를 신은 사람을 뭔가 특이하게 보는 게 말이다.

그런데 요즘엔 에나멜 같은 매끄럽고 반짝이는 소재가 유행이다 보니 장화도 하나의 패션 아이템이 된다. 장화 같지 않은 장화, 장화처럼 만든 신발 등 종류도 많아졌다. 망설이지 말고 장화에 도전해 보는 분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런 내 모습을 상상한다. 장화와 우비를 세트로 갖추고, 예쁜 우산까지 쓰고 횡단보도에서 파란 신호를 기다리는 모습. 우와~ 상상만 해도 영화 같지 않은가!

불쾌지수 높아지는 장마철이다. 이런 때, 예쁜 장화 하나 장만하고 비를 기다리면 불쾌지수가 뚝 떨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거리에 영화에나 나올 법한 로맨틱한 우비와 장화 패션을 한 여성들이 넘친다고 상상해 보라. ‘즐거운 장마’가 따로 없을 것이다.

장화 애호가로서 잔소리 한마디! 장화를 신을 땐 반드시 반양말을 신을 것. 이걸 명심하지 않으면 10분도 안 돼 그 이유를 알게 된다.

황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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