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 다시 시작하자]2.열악한 주변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프랑스월드컵에 출전한 한국축구대표팀은 어떤 대표팀보다 지원을 많이 받았다. 축구협회는 선수선발과 운영 등 감독에게 거의 전권을 허용했고 유럽전지훈련이나 평가전, 그리고 선수단 운영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만약 멕시코월드컵때 지금처럼 지원했더라면 1승과 16강은 그때 이미 할 수도 있었다" 는 얘기가 나돌 정도다. 그러나 대표팀에 대한 집중투자에는 한계가 있다.

매일 보리죽만 먹던 사람에게 갑자기 고기를 먹이는 것과 같다. 아시아권에서는 통했지만 월드컵에서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공을 잘 찬다는 선수들을 모아놓은 대표팀에서 기본기부터 다시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이를 명백하게 증명해 준다.

한국만이 맨투맨 수비를 했던 것은 지역방어를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기본기보다 승부를 가르치는 한국축구의 현실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어렸을 때 기본기를 가르쳐야 한다' 는 사실을 모르는 지도자는 없다.

그러나 당장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물러나야 하는 현실에서 기본기를 가르칠 지도자는 없다.

지도자가 하려고 해도 당장 진학을 걱정하는 학부모들이 반대한다. 학교체육의 한계다.

빨리 클럽축구를 활성화시키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는 상존할 것이다. 우선 일본처럼 학교와 클럽 체제를 병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매 맞으면서 억지로 하는 축구는 '생각없는 선수' 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축구' 를 하다가 자질이 발견돼 프로선수가 되는 축구 선진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후진국중 후진국이다.

재미있는 경기로 팬들을 끌어모아야 할 프로구단들도 승부에만 집착하는 것이 한국축구의 현실이다.

이제는 말하기도 싫은 것이 잔디구장 문제다. 선수들의 한결같은 하소연이 "축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달라" 는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읍 단위에도 제대로 된 잔디구장을 갖추고 있는 프랑스 현장을 지켜보면서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 올라온 것만 해도 잘한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선수나 돼야 잔디구장에서 뛸 수 있는 여건에서 세계 수준의 기술을 요구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축구협회는 유소년 축구에 더욱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축구부가 있는 학교만이라도 어린 선수들이 마음껏 뛰고 구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전국에 50개가 넘는 잔디구장만이라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운동장 관리를 '무사안일' 의 공무원이 맡는 한 한국축구의 발전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빨리 민간이 관리하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축구발전은 결국 축구인들의 몫이다. 정부에 대고 이렇고 저렇고 말하기 전에 축구인들이 먼저 자발적으로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

끊임없이 세계축구의 흐름을 파악, 이제부터라도 우물안 개구리의 신세를 면해야 한다. 축구협회는 지난해 '축구발전 세미나' 를 열었다.

한국축구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거론됐지만 실행에 옮겨지는 것은 거의 없다.

손장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