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대책 vs 대책’… 고1들 “시험 잘 볼 필요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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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2시 서울 A고교의 고1 교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시험공부를 하던 학생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학입시에서 고1 내신성적을 반영하지 않는 방안이 추진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고1 성적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시험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이 학교 교사들은 “검토 중인 안이 마치 확정된 것처럼 알려져 학생들만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며 “학생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말했다.

설익은 사교육 경감 대책안이 학생과 학부모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확정되지 않고 논의 중이거나 검토 중인 대입·고입 안이 마치 결정된 것인 양 알려지면서 교육 현장이 어수선한 것이다. 핵심은 사교육 경감 대책에 포함된 입시안이다. 사교육 대책안은 두 달 사이 세 번이나 나왔다. 5월 초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의 ‘심야 학원교습 금지’를 골자로 한 안에 이어 정부의 ‘사교육 경감 대책’(3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의 ‘사교육과의 전쟁’ 세미나(26일) 등이다. 특히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 주도로 열린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은 고교 내신 절대평가 등 파격적인 것이 많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교육비 절반, 공교육 만족 두 배’를 실천하기 위한 의지도 담겨 있다. 정두언 의원은 28일 “당·정·청이 실무협의를 계속해 가급적 빨리 확정해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몸 사리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교육과학부도 비상이 걸렸다. 휴일인 28일 오후 안병만 장관 주재로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2시간 이상 대책을 논의했다. 하지만 별다른 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이번 주 당정협의 때까지 계속 논의한다는 기본 입장만 밝혀 또 몸만 사린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결정된 것은 아직 없다=고1 내신을 대입 전형에서 배제한다는 안은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시도하지 않은 안이다. 미래기획위원회 안선회 자문위원은 “고1 때부터 입시준비에 매달리는 과열 현상을 완화하고 내신 사교육비도 줄이기 위한 대책”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상명대 부속여고 권희정 교사는 “고1 교실이 무력화할 우려가 있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입 내신을 현행 9등급 상대평가에서 5등급 절대평가로 바꾸는 방안도 찬반이 엇갈린다. 경기도 B고교의 한 교사는 “2004년까지는 절대평가를 했지만 대학들이 고교 내신을 믿지 않아 상대평가로 바꾼 것”이라며 “대학의 신뢰가 없으면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3 학부모 김민호(45)씨는 “친구끼리 경쟁하는 비교육적인 내신 부담을 덜 수 있는 방안”이라며 “교과부가 너무 소극적으로 대처한다”고 주장했다.

1994학년도에 연 2회 실시했던 수능 횟수를 늘리는 안도 ‘수험생 부담 가중’과 ‘기회 확대’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문제는 시행 시기다. 대입제도는 수험생 혼란을 막기 위해 통상 시행 3년 전에 사전 예고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수능을 2회 이상 치르려면 2013학년도(2012년)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특수목적고 입시 개선안도 명확히 정리해야 할 사안이다. 교과부의 특목고 입시 개선안은 특정 과목에 대한 과도한 가중치를 금지하는 등 전반적으로 내신 비중을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여의도연구소는 외고는 영어·국어, 과학고는 수학·과학 내신만 반영하도록 하는 안을 내놓았다. 중학교 교사와 학부모·학생이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중앙대 이성호(교육학과) 교수는 “교육 수요자들이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질 높은 공교육을 키워야 사교육이 줄어들 수 있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종합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교총 김동석 대변인은 “서로 다른 내용의 사교육 대책에 대한 논란을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휴일 대책회의 공전=안 장관의 퇴진설까지 거론되자 교과부는 비상이 걸렸다. 28일 안 장관 주재로 실·국장 회의를 열고 난상토론을 벌였으나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과부 고위 관계자는 “교육정책의 주도권이 청와대와 한나라당으로 넘어간 것 같아 분위기가 침통했다”며 “대통령까지 사교육 경감에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정두언 의원의 안을 수용하기는 어려움이 많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기존 대책을 다듬어 조속히 집행하자는 의견이 많았다”며 “당정협의를 통해 논란이 된 사안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목·임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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