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이념Ⅰ’과 ‘이념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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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마이클 잭슨은 지금쯤 달 위를 걷고 있을 것이다. 살아서 그는 이념 문제를 고민한 적이 있을까. 인종차별은 몰라도 좌·우를 고뇌한 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잭슨뿐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인이 그럴 것이다. 미국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진국 사람이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다르다. 많은 이가 이념으로 쇠파이프를 들고 이념을 안주로 술을 마신다. 왜 그러는 것인가.

한국과 선진국의 차이는 이념 고민의 양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념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공동체의 정체성에 관한 것과 공동체 운영 방식에 관한 것이다. 쉽게 이념Ⅰ, 이념Ⅱ라고 하자. 이념Ⅰ은 국가가 어떻게 세워져 어떤 역사를 거쳤고 지금의 형태는 무엇이며 장래의 목표는 무엇이냐는 정체성의 문제다. 이념Ⅱ는 공동체를 어떻게 꾸려 나가느냐는 방법론의 문제다. 정부 규모·세금·복지제도 같은 경제 이슈나 소수자·낙태·동성애·노조·교육 규제·사형제도 같은 사회적 어젠다(agenda)인 것이다. 이념Ⅱ의 갈등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걸 놓고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집권한다. 그러나 이념Ⅰ은 다르다.

선진국 대부분은 이념Ⅰ의 갈등이 별로 없다. 영국 왕과 싸워 독립국을 세우고, 피의 내전으로 노예제를 없앴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제(專制)로부터 자유를 지켜낸 역사를 놓고, 미국인은 싸우지 않는다. 월남전 갈등이 있었지만 국가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이라크전도 개전(開戰) 때는 공화·민주당이 거의 한목소리였다. 영국인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초로 입헌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나치에 대항해 국가를 지켜낸 역사에 대해, 보수당과 노동당이 대립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시절 인도를 비롯한 많은 식민지에서 학살을 저질렀지만 이걸 놓고 국민이 갈라지진 않는다. 프랑스는 또 어떠한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자유·평등·박애의 ‘삼색(三色)가치’를 세우고, 인류의 문화·예술·지성사에 찬란한 유산을 남긴 역사에 대해, 보수와 진보가 싸울 일이 없다. 점령군 나치독일에 부역한 이들을 깨끗이 단죄해 한국 같은 친일 논쟁도 없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념Ⅰ의 갈등으로 나라가 들썩인다. 선진국 대부분은 18~19세기 왕으로부터 국민이 주권을 찾아오는 탈(脫)봉건의 과제를 국민의 힘으로 이뤄냈다. 그런데 조선은 그 중요한 시기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조선 백성 스스로가 그런 근대화의 역사를 이뤘다면 지금 한국 사회를 괴롭히는 이념Ⅰ 갈등은 상당 부분 줄어들었을 것이다. 일제 36년이란 실종의 역사가 있었기에 친일파 문제가 뜨겁고 ‘이승만 건국’의 정당성이 논란이 된다. 반도의 절반이 공산주의가 되는 바람에 여전히 한국전쟁, 좌·우 대립, 반공과 독재, 햇볕과 강경을 놓고 갈등의 골이 깊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념Ⅰ은 한국인에겐 숙명인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핵과 세습 독재, 선군주의가 결합한 강력한 공산집단과 대치하고 있다. 그런 생존의 문제가 있는 한 이념Ⅰ은 한국인에게 불변의 주거환경이라고 봐야 한다. 분단 64년이다. 산업화·민주화에 맞춰 국민 전체가 공동체의 자랑스러운 정체성에 자연스레 생각을 합쳤다면 갈등은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이 정체성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 들어 이념Ⅰ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이다.

국민의 숙명이라면 대통령에게는 더욱 숙명적인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명확하지 않은 ‘중도강화론’으로 이 숙명의 문제에서 도피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정체성에 안개가 깔리자 이론가 참모 이동관·박형준이 서둘러 “보수라는 원칙을 지키면서 적극적으로 서민을 껴안자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른바 ‘따뜻한 보수’라는 것이다. 대통령은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했어야 했다. 이념Ⅰ에선 원칙, 이념Ⅱ에선 유연성… 이것이 대통령이 가야 할 길이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