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 따라해보지 않은 청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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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83년 처음으로 TV에서 마이클 잭슨이 ‘빌리 진’을 부르며 유연하게 뒷걸음질 댄스를 했을 때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추는 거지?’ 마치 달을 밟고 걷는 것 같다고 해서 ‘문 워크’라고 불린 그 춤은 순식간에 전 세계 젊음의 모방 본능을 자극했다. ‘왜 마이클 잭슨의 얼굴이 하얗게 바뀐 거야?’하고 의심할 여유가 없었다. 필자도 방에서 몰래 ‘문 워크’를 흉내 내다가 뒤로 넘어져 다치는 봉변을 겪었다.

하긴 전설적인 ‘춤의 배우’인 프레드 아스테어가 ‘경이적 춤꾼(wonderful mover)’이라고 격찬한 사람의 동작을 어찌 쉽게 재현할 수 있겠는가. 여배우 제인 폰다는 “마이클 잭슨의 음악에 맞춰 춤출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섹스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다. 그의 음악을 듣고 가만있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춤만이 사람들을 홀린 것은 아니었다. 천재적 감정표현과 비트 감각에다 어릴 적부터 노래한 풍부한 이력은 가창력 측면에서도 그를 발군으로 만들었다. 녹음기술의 측면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언제나 유행을 선도했다. 앨범을 살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도 ‘스릴러’ LP는 50만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세계적으로는 1억장 이상의 판매고를 수립, 단일 앨범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그의 출중한 역량은 1980년에 시작된 음악전문채널인 MTV 시대와도 맞물렸다. 이제 마이클 잭슨과 함께 음악의 중심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동했다. ‘비주얼 댄스’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1980년대 중후반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의 댄스가수가 속출했다. 서태지도 어릴 적에 마이클 잭슨을 동경하면서 댄스음악의 무한 파괴력을 가슴속에 담아뒀을 것이다.

80년대 이래로 전 세계 많은 키드들은 마이클 잭슨을 ‘팝의 제왕(king of pop)’으로 여기며 그의 음악과 공연을 찬미하는 법을 배우며 성장했다. 한국도 이전 댄스음악, 댄스가수라는 수식이 없었으나 마이클 잭슨 시대를 맞아 상용화되었다.

그는 또한 음악적 현상을 넘어 사회적 현상이었다. 그의 ‘슈퍼스타덤’에는 백인지배사회에서 신음한 흑인들의 비상 욕구와 자긍심이 저류하고 있다. 그와 같은 흑인스타들의 분발로 미국은 우리 생애 어려울 것 같던 오바바 흑인 대통령을 보게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어린이 성추행파문, 성형수술 부작용, 결혼 실패, 재정적 파산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면서 인기는 추락했고 장기간 칩거로 8년간 신보 한 장 내지 못했다. 근 10년간 마이클 잭슨 관련 소식은 온통 우울한 성질의 것들이었다.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와 같은 높이를 자랑하는 그의 음악사적 위상이 견고하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급작스런 사망은 전설의 지평을 더 위로 올려줄 것이다. 벌써부터 그와 함께 했던 즐거운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시작되었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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