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러시아 전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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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8일 인천항에는 치요다(千代田)호 등 8척의 일본 군함을 비롯해 각국의 군함들이 정박해 군함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러일간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자 일본측은 러시아 군함들에 '9일 정오까지 인천항을 떠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했다.
러시아 군함들도 물러서지 않고 9일 오전 10시 인천항 바로 바깥의 팔미도 해상에서 일본 군함들과 40여분간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일본 군함들의 집중포화에 만신창이가 되어 소월미도로 쫓겨올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 국기

러시아 함장들은 '군함기를 모욕받느니 명예로운 길을 택하겠다'며 오후 3시 30분 코리예츠호가, 5시께에는 바리야크호가 잇따라 자폭을 감행했다. 전날 인천항에 들어와 있던 숭가리호도 같은 운명의 길을 택했다. 러일전쟁의 첫 접전인 이 해전은 후일 제물포 해전으로 불리워졌다.

이날 인천 앞바다에 수장된 러시아 전함 바리야크(Varyag)호의 유물이 105년만에 조국으로 나들이 간다. 인천시립박물관은 러시아 국립박물관 전시센터(ROSIZO)와 이들 자폭 침몰 함정들의 유물을 러시아에 대여해 전시하기 위한 협정서를 체결했다고 25일 밝혔다. 대여 기간은 8개월간이며 내달 초 러시아로 운송된다.

대여 유물은 바리야크호와 코리예츠호의 군함 깃발들과 총·포탄·포탄피·사진첩 등 모두 14점이다. 이 중 러시아측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군함 깃발이다. 바리야크함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헌신과 희생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측은 그간 수 차례 이들 유물의 대여를 타진해 왔으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지금까지 미뤄져 왔다. 러시아 정부는 2004년에는 인천 연안부두에 '제물포 해전 100주년 기념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바리야크함 깃발

러시아 해군의 날인 7월 26일 막을 여는 전시회의 공식 명칭도 'Varyag'다. 상트 페테스부르크의 국립 에르미타주미술관에서 시작돼 내년 2월 블라디보스톡의 태평양함대 군사박물관에서 막을 내리기까지 러시아 9개 도시를 순회하며 열린다. 무르만스크(북해함대 해군박물관), 세베로몰스크(함대박물관), 세바스토폴(흑해함대 박물관) 등 러시아의 해군 군항을 순회하는 코스다.

일본 해군은 전쟁이 끝난뒤 해저 50m 아래 가라앉아 있던 바리야크호를 인양해 일장기를 달아 전시했다. 이번에 대여되는 유물들은 이 때 건져 인천향토관에 보관해 두었던 것을 1946년 인천시립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인수한 것이다.

포탄피(左)와 포탄

비운의 바리야크함은 1916년께 제정 러시아가 일본으로부터 사들여 본국으로 옮겨 가던 중 스코틀랜드 앞바다에서 암초에 걸려 다시 침몰됐다. 2005년 러시아 탐사팀이 이 전함을 발견했으나 부식상태가 심해 인양작업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에서는 바리야크호를 소재로 한 영화도 제작됐다.

인천=정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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