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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럽 사이 중매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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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과 유럽 사이에 의견대립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냉전이라는 서로 다른 지정학적 상황과 지성(知性)적 배경, 정치적 구조의 차이에서 마찰음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국은 서로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통제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했다. 소련을 저지하거나 격퇴할 수 있는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탈 냉전시대의 지정학적 상황은 비교적 분명하다. 우선 미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있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인도와 '확대된 유럽' 같은 강대국들은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성.정치적인 환경은 그리 분명치 않다.

상호협력은 그동안에도 계속돼 왔다. 1990년대 유럽과 미국은 힘을 합쳐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물리쳤다. 또 그들은 보스니아와 코소보의 인종갈등을 저지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확대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테러리즘 퇴치에 협력해 왔다.

그러나 국제형사재판소, 교토의정서, 대(對)탄도미사일협약, 유엔의 역할 등 최근의 이슈에 대한 의견 분열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다. 유럽은 미국이 무비판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란.북한.시리아, 사담 후세인 통치시절의 이라크 등 미국이 거론하고 있는 이른바 적색국가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가 크다. 유럽은 대화와 유인정책을 선호한다. 반면에 미국은 고립과 처벌을 중시한다. 이 차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유럽은 범대서양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나 유럽이 안정과 번영의 대륙으로 남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유럽 통합이 모든 것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유럽은 지역 내 갈등과 세계화라는 과제에 매우 취약하다.

유럽인들은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성취해 낼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유럽이 미국과 지정학적으로 동등한 조건에 놓여 있고 서로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실현될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유럽은 군사력을 더 증강해야 한다. 미국과 같은 막강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파트너로서 활동할 수 있기 위해서다. 미국이 군사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할 때 유럽이 다른 정책 수단을 사용하자고 주장하게 되면 양자는 점차 분열될 것이다. 효과적인 외교를 위해서는 대화와 유인뿐 아니라 필요하면 경제제재나 군사적 힘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럽은 인정해야 한다.

미국은'강한 유럽'이 미국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한다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된다. 강한 유럽은 적어도 잠재적인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지만 약한 유럽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미국은 유럽통합을 지원해야 한다.

이제 진정한 협의가 필요할 때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과 유럽이 서로 간의 의견대립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관계를 악화시키는 불화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미국은 자신이 제안한 해법이 국제사회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받아들여질 때 그들의 입장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미국은 처벌뿐 아니라 유인정책도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가 되고 있는 나라가 미국으로부터 의미있는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미국이 제시한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식의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

유럽에도 책임이 있다. 미국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지지하지 않는 것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후자는 동맹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유럽지도자들은 반미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협조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필요로 할 때 미국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파트너로 남아야 한다.

미국과 유럽 관계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범대서양관계는 '전부냐 또는 전무(全無)냐'는 식으로 결정돼서는 안 된다.

리처드 하스 미 외교관계위원회 의장
정리=한경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