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과 문화

일본에서 온 초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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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일본국제교류기금이라는 단체가 있다. 그런 단체가 있다는 소리는 오래 전부터 들은 것 같은데 나 같은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서 그냥 지나쳤었다. 그런데 사람이 살다보면 별일이 다 생기는 법. 바로 그 단체에서 나한테 초청장이 왔다. 그때서야 나는 일본국제교류기금이 뭘 하는 단체인지를 신경 써서 알아보게 되었다. 영어로는 The Japan Foundation이었다. 영어로 알아봐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였다. 대체로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일본 정부에 속한 독립행정부처로, 하여간 돈이 무지하게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초청장이 왔다. 말하자면 일본 쪽에선 초청장과 함께 여러 가지 문서가 딸려왔는데 나 같은 사람은 서류가 두꺼우면 우선 기가 죽는다. 영문 서류인 경우는 더 그렇다. 내용은 대강 내가 올해 안에 아무 때나 15일간 일본 어느 곳에나 체류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 만나게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오고 가는 비행기며 체류기간에 묵는 호텔이나 음식의 급수까지 원하는 대로 배려해 준다는 얘기였다. 말하자면 국빈대우라는 의미였다.

나는 일단 너무도 고맙기에, 좋다 가겠다 그런데 가기 전에 당사자들끼리 한번 만나서 얘기나 해보자 해서 우린 서로 만났다. 그리고 내가 먼저 하고 싶었던 얘기부터 꺼냈다. 나를 초청해 줘 고맙기 그지없지만 나는 내 돈을 들여 일본을 둘러볼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한테 배당된 몫을 돈 여유가 없는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하고 멋진 제의를 했는데 웬걸 내 의견은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았다.

과연 초청장을 보니 거기엔 '매년 세계 각국의 일류문화인을 일본에 초빙해' 운운으로 나간다. 하! 내가 졸지에 세계 일류문화인으로 선발된 거다. 가수생활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우스갯소리지만 나도 배용준처럼 엉뚱하게 일본에서 대접을 받게 생겼다. 그쪽 사람들이 하도 예의 바르게 일본의 어디든 모셔다 드리고 일본의 누구든 만날 수 있게 해준다기에 내가 특별 부탁 하나를 했다. '제가 홀아비 생활 어언 10년째입니다. 그저 참한 일본 아가씨 한명만 중매해 주십시오' 했더니 조크는 양국 문화의 저울대를 타고 한바탕 출렁거렸다.

그럼 나는 왜 일본의 반짝 초청을 받게 된 걸까. 사실은 간단하다. 내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내가 신문에 쓴 몇줄의 글이 문제를 야기한 셈이다.

그러니까 2002년 월드컵 8강과 4강 때 나는 공교롭게도 방송관계로 일본 도쿄(東京)에 머물게 되었다. 거기서 TV로 방송되는 축구를 보면서 나는 참 뜻밖의 광경을 관찰하게 됐다. 그때 일본은 16강에서 일찌감치 떨어져 나갔는데 이게 웬일인가. 일본 청년들이 한국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것 아닌가.

나는 얼른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았다. 한국이 16강에서 떨어져 나가고 일본이 8강.4강에 올랐다면 내가 일본을 그토록 열렬히 응원할 수 있을까. '재팬재팬 짝짝짝 짝짝'이렇게 손뼉을 쳐줄 수 있을까. 글쎄 지금은 어떨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우리네 특유의 시기와 질투로 괜히 심기가 불편할 듯싶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도쿄에서 본 인상을 바로 지금 쓰고 있는 '삶과 문화'칼럼에 보고 들은 대로 써냈다. 따지고보면 그건 노골적인 일본 예찬이었다. 아직도 우리는 일본에만은 조심스럽고 인색하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나는 내친 김에 자진해서 친일파가 되겠다고 큰소리까지 쳤다. 바른 사람만 많은 세상에 삐딱한 사람 한명쯤은 봐줄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내 글이 일본까지 간다는 것도 몰랐고 글만 잘 쓰면 엄청 수지맞는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사인을 했으므로 나는 9월 말에는 일본에 간다. 기대하시라.

조영남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