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겉핥기 도요타 배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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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진 디지털뉴스센터 기자

도요타 자동차의 공장 작업자들에게는 '두뇌를 쓰지 않는 동안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 1950년대 이후 전해져 내려온다.

조립 라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작업만 하면 '그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는 얘기다. 볼트 하나를 조여도 '어떻게 하면 더 완벽히 조일 수 있을까. 순서를 바꾸면 더 효율이 높지 않을까'하는 식으로 개선점을 고민하면서 작업해야 '일을 한다'고 본다.

한국에 도요타 배우기 바람이 거세다. 도요타 본거지인 나고야에는 한국인들이 넘쳐난다. 주로 삼성.LG.현대차그룹 등 대기업 간부들과 공무원.재계 관계자다. 1년 반 동안 2000여명이 도요타 공장을 다녀갔다. 지금도 도요타 본사에는 한국에서 온 방문 요청서가 첩첩이 쌓여 있다.

그러나 정작 견학 이후 이들이 내놓은 반응 가운데는 "낡은 공장에 자동화 시설도 변변치 않아 별것 아니다" "우리 실정에 안 맞는 게 많다. 그래서 배울 게 없다"는 식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나고야에서 만난 도요타 관계자들이 들려준 얘기다.

또 같은 회사에서 견학 온 사람이 전에 왔던 사람이 물었던 것을 되풀이해 묻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견학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고 사내에 전파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미국도 80년대 초 도요타 배우기를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그러나 90년대 초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들이 벤치마킹한 것은 도요타의 무재고 시스템인 저스트인타임(JIT), 작업 중 문제가 생기면 흰 줄을 잡아당겨 라인을 멈추게 하는 '정지 끈' 등 눈에 보이는 것 정도다. 결국 생산성 향상에는 실패했다.

미국 업체들은 2000년 이후 도요타 배우기 '재수'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종신고용을 바탕으로 한 노사 신뢰와 현장 작업자의 '가이젠(개선)' 의지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의 도요타 배우기 바람이 미국이 20여년 전에 했던 것처럼 수박 겉핥기로 끝날까봐 걱정이 앞선다.

김태진 디지털뉴스센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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