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알모도바르 감독 새비디오'키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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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속옷광고를 촬영중인 사진작가 라몽의 시선대로 훑어가며 시작한 영화는 이내 천박하고도 솔직한 말씨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키카에게로 옮겨간다.

키카는 라몽의 애인이지만, 라몽 어머니의 남편이었던 작가 니콜라스와도 이따금 몸을 섞는 사이. 의붓 부자 (父子) 사이에 양다리 걸친 애정행각이 들통날 즈음 포르노 배우 출신 탈옥범의 강간 사건이 터진다. 관객은 옆 건물에서 망원경을 놓고 훔쳐보던 익명의 사건신고자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정력을 주체못하는 황당한 강간범의 행각을 '훔쳐보기' 혹은 '영화보기' 의 즐거움에 포함시켜야되나 말아야되나. 이 때 나타나는 것은 머리위에 비디오 카메라가 장착된 전투복차림의 TV리포터 안드레아. 이 정신없는 영화에서 위선에 쌓인 연쇄 살인사건의 수수께끼를 푸는 장본인이다.

성과 범죄와 대중매체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욕망과 위선에 얽힌 이야기를 원색의 색채감각과 기발하고 솔직한 연출로 풀어내는 '키카 (Kika)' .88년작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 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스페인의 괴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93년 작품으로 다음달초 출시된다. '키카' 는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화질 나쁜 복사판 비디오가 돌만큼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극장에는 지난 4월 복합관 강변CGV11 개관 때 무료상영되고 5월 일부극장에 잠깐 걸리는 데 그쳤다.

덕분에 알모도바르에 대한 국내의 대접은 여전히 '비디오용 컬트감독' 수준. '신경쇠약…' 외에도 '마타도르' (86) '욕망의 낮과 밤' (90) '하이힐' (91) 등이 출시돼 있다. 어느 비디오가게 선반에서 에로물 단골손님을 헷갈리게 할 지 모를 이런 운명은 어쩌면 '싸구려 취향' 의 직설화법을 고집해온 알모도바르에게 적격인 대접일 지 모른다.

아무튼 '키카' 가 유명한 또다른 이유는 지아니 베르사체 (키카) , 조르지오 아르마니 (니콜라스) , 폴 스미스 (라몽) 등 일류디자이너가 만든 극중 의상. 전위적인 장난기로 유명한 장 폴 고티에는 TV리얼리티쇼 진행자로 나오는 안드레아의 의상을 맡았다. 가짜 가슴을 드러낸 흡혈귀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추적60분' 이나 'PD수첩' 을 진행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이 두 동성애자, 고티에와 알모도바르의 감수성이 빚는 세계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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