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불신 가중시킨 정책혼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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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 12일, 산업은행 : "예금인출사태와 금융시장 불안을 막기 위해 정부의 요청에 따라 새한종금을 인수하기로 했다."

- 13일, 청와대 관계자 : "대통령의 부실금융기관처리 원칙에도 위배되고 호남기업 편들기란 부정적 인식만 심어줄 수 있어 바람직하지 못하다."

- 13일, 재경부 : 채권 (7천8백억원) 을 떼일 것을 우려한 산은이 제3자 매각을 전제로 인수의사를 밝혀 받아들였다."

- 13일, 국민회의 김원길 (金元吉) 정책위의장 : "산은 발표는 인수의사를 표명한 것일뿐 실사를 거쳐야 인수여부가 결정날 것이다."

- 14일, 이헌재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 : "거평그룹이 부도난다고 해서 최대 채권자인 산업은행에 채권확보를 지시했고, 산은은 거평의 새한종금 주식과 처분위임장을 받아둔 것 뿐인데 잘못 전달됐다."

이상은 느닷없이 발표됐던 산은의 새한종금 인수가 재검토로 전환하기까지 사흘동안 공개된 정부와 여권의 입장변화다. 산은의 기아인수 발표로 나라전체의 신인도가 추락했던 게 불과 7개월전인 것을 감안하면 당연히 발표에 앞서 관계기관간 치밀한 의견조율이 있었을 법도 한데 겉으로 봐선 그런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정부내 혼선이 거듭되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가뜩이나 신용등급 하락으로 불안하던 산은의 해외채권 가격은 수직 하락했고, 국제 금융계에선 "한국의 금융구조조정은 물 건너갔다" 는 평가가 일시에 확산됐다. 새한종금도 정리하지 못하는 한국정부가 어떻게 부실은행들을 퇴출시켜 구조조정을 이룰 수 있느냐는 불신이 높아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경제의 사활은 국제투자자들의 신뢰를 얻는데 달려 있다. 그렇지만 정작 외국인들 중에는 한국의 구조조정 작업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느는 듯하다.

김대중대통령은 지난달 고위공무원들에게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실패하면 여러분은 물론 나라가 파멸한다" 며 분발을 호소했다. 단 한번의 정책결정 착오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대통령의 위기의식을 정부와 여권이 고루 공유할 수는 없을까.

이상렬〈정치부 기자〉

〈lees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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