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용 교통체계 바꾸는 ‘강만수 20년 집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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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올 3~4월 뉴욕·런던·파리·베를린·도쿄 등 세계 5대 도시에 교통 신호등을 촬영하는 한국 공무원들이 나타났다.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와 국토해양부·경찰청 소속인 이들의 임무는 선진 도시의 교통체계를 운전자 입장에서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직접 운전대를 잡고 도시를 누볐다. 구한말 신사유람단이 일본 문물을 둘러본 것처럼 세계 일류 도시의 교통 경쟁력을 살펴본 것이다.

이들 도시의 교차로에선 직진 차량이 우선이고(직진 후 좌회전 원칙), 3색 신호등이 운영되고 있었다. 좌회전 신호를 직진보다 먼저 주거나 직진과 좌회전을 동시에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4색 신호등이 기본인 한국과는 사뭇 달랐다. 우리 도시의 교차로 대기 시간이 대개 180초 이상인데 비해 이들 도시는 60~120초에 불과했다. 한국 교차로에서 자주 벌어지는 과속과 꼬리 물기는 찾기 어려웠다.

이들이 만든 동영상과 보고서는 4월 말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후 교통신호 체계 개편은 급물살을 탔다. 당장 7월부터 신호기 위치가 조정되고, 10월부터는 비보호 좌회전이 확대되고, 회전교차로가 늘어난다. 내년 이후엔 신호원칙이 직진 우선으로 바뀐다. 신도시엔 새 교통시스템이 전면 적용된다. 최근 정부가 국가경쟁력 높이기 프로젝트의 하나로 확정한 교통운영체계 선진화 방안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따르면 이를 통해 차량의 속도가 빨라지고, 교통사고가 줄어드는 등의 경제적 효과가 연간 5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강만수(사진) 국경위원장은 11일 기자와 만나 “불합리한 교통체계로 인해 돈과 에너지, 시간이 낭비되고 법 질서를 경시하는 풍조까지 생기고 있다”면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고 국민이 지키기 편한 교통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교통체계 개편은 강 위원장의 20년 집념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1988년 강 위원장은 옛 재무부 보험국장이었다. 당시는 빈발하는 교통사고가 손해보험업계의 이슈였다. 그는 교통문화와 법규의 후진성이 문제라고 봤다. 눈비가 오는 날이나 야간에 전조등을 켜지 않고 있다가 생기는 사고가 많았다. 그는 손해보험협회와 손잡고 ‘전조등 켜기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좌회전 우선의 신호원칙을 고치기엔 역부족이었다. 2006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 시절 다시 고치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올 2월 국경위원장이 되자 다시 교통체계 수술에 나섰고, 마침내 결실을 거뒀다. 강 위원장은 “왜 이런 교통체계가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말했다. 80년 넘게 굳어온 ‘좌측보행’ 원칙을 ‘우측보행’으로 바꾸는 데도 그의 뚝심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좌측보행의 기원을 모두 뒤졌다. 1924년 조선총독부령이 그 시작이었다. 그 뒤 줄곧 우리만 좌측보행이었을 뿐 세계는 모두 우측보행이었다. 엉뚱하게 생긴 좌측보행 관습은 해외에 나간 한국인들이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는 ‘충돌’의 원인이 됐다. 정부는 10월부터 우측보행으로 바꾸고, 좌측보행을 가르쳐 온 교과서도 내년부터 개편한다.

강 위원장은 다음 프로젝트로 영어 표기법 바로잡기를 추진 중이다. 이름과 지명, 도로표지판 등의 같은 소리가 영어로는 제각각으로 표기되는 바람에 한국의 국제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강 위원장은 MB노믹스의 설계자이자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다. 경제정책은 그의 전공이다. 그에게 경기가 바닥을 지났느냐고 물었다. 그는 “주요 수출시장인 미국·일본·중국 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어 바닥이냐 아니냐는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저소득층 대책과 연구개발(R&D)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저소득층 문제가 부동산 투기보다 더 걱정”이라며 “직업훈련 강화가 저소득층 대책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양질의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정부가 저소득층의 직업능력을 키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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