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배우출신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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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81년 3월30일 오후2시35분 워싱턴 힐튼호텔에서 연설을 마치고 나오던 중 권총세례를 받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총알 한 개가 폐를 뚫고 들어가는 중상이었음에도 짐짓 태연했다. 그는 혼자 걸어 병원으로 가려했으나 무릎 부상 때문에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들것에 실려가면서 그의 첫마디는 이랬다. "총에 맞고도 죽지 않는 것은 기분좋은 일인걸. " 그리고 나서 혼비백산한 낸시에게는 "여보, 피하는 걸 깜빡 잊었어" 라고, 둘러싼 의사들에게는 "당신들이 모두 공화당원이었으면 좋겠소" 라고 농담을 던졌다.

사람들은 그의 용기와 침착성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같은 용기와 침착성은 오랜 연기생활의 경험이 바탕을 이뤘을 것이라고 보는 측도 없지 않았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배우시절 영화촬영중 머리근처에서 권총이 잘못 발사되는 바람에 혼난 적이 있고, 그것이 청각장애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그렇다고는 해도 레이건이 정계에 입문한 뒤 줄곧 보여준 용기와 침착성은 그의 천품일 뿐 연기체험과 무관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좋은 의미든 아니든 그에게 줄기차게 따라붙는 '배우 출신' 이란 관형사의 정체는 무엇일까. 연예인을 우상 (偶像) 으로 삼거나, 심지어 반신화 (半神化) 하려는 대중의 속성 탓이다. 문제는 그같은 경향이 연예인들의 '역할' 에 대한 것일 뿐 그들의 '진면목' 에 대한 것은 아닌데도 대중은 흔히 그것을 혼동한다는 점이다.

1930년대 인기절정이었던 게리 쿠퍼에게 극성팬들이 대통령 출마를 강권했던 것이 좋은 예다.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인기하락 탓도 있었지만 한 영화에서 쿠퍼가 훌륭한 정치가의 상 (像) 을 보여준 것이 빌미였다. 그러나 쿠퍼는 "나를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착각하지 말라" 고 거절했다. 그런 자세가 그를 '영원한 명배우' 로 남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엊그제 실시된 필리핀 대통령선거에서 액션배우 출신의 현직 부통령인 조지프 에스트라다 후보의 당선이 확정적이라 한다. '경제 문외한' 이란 평가에다 도덕적 결함까지 지니고 있다는 그가 당선권에 이른 것은 역시 '배우 출신' 이 상당한 작용을 했을 법하다. 하지만 경력이 여러모로 레이건과 꽤 닮아 있다는 점에서는 필리핀의 새 모습을 기대해볼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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