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해질녘에 아픈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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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 아픈 사람
신현림 지음, 민음사, 117쪽, 6000원

기행문·에세이 쓰기와 번역에 열중하던 신현림(43)씨가 세번째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펴내며 다시 시의 자리로 돌아왔다. 1996년 『세기말 블루스』 이후 8년 만이다.

신씨는 시집 첫 머리 자서(自序)에서 “끝간 데 없이 힘겨운 나날을 일 중독으로 잘 살아냈고, 배우려고 하는 한 괴로운 체험도 버릴 게 없음을 깨달았다”는 말로 시인으로서 ‘잃어버린 8년’을 정리했다.

시집 곳곳에서는 신씨를 끝없이 힘들게 했던 사정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경제적인 어려움이 신씨를 짓눌렀다. ‘꿈꾸기엔 늦지 않아’에서 두려운 것 중 하나로 불황과 실업의 소용돌이를 꼽았던 신씨는 ‘헝그리 정신’에서는 “가난의 마지막 지옥”의 무서움에 대해 말한다.

가난을 떨쳐 내거나 최소한 가난과 불화하지 않는 길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돈이 되는 일거리에 매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집과 회사가, 출근길 전철이/나를 공처럼 주고받는” 사이 “나는 늙어간다 지쳐간다”(‘디카로 찍은 거리 사진’중).

남편 없이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치명적인 삶의 조건은 ‘싱글 맘’신씨를 술마시게 한다.

신씨는 ‘싱글 맘-술이 쏟아지는 샤워기처럼’에서 아이를 바라보며 “군중, 사내 냄새, 여행, 따뜻한 돈…”이 그립다고 넋두리한다. 현실의 부하(負荷)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위력적일 때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것은 아픔의 토로 또는 비명일 것이다.

신씨의 시편들은 종종 절박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중얼거림 같다. 그 중얼거림은 가다듬어지지 않아 직접적이고 거칠다. 또 상식적이고 마취적인 자기 규율 내지는 결심으로 흐르기도 한다.

가령 ‘싱글 맘-원더풀 마이 라이프’에서는 “계속된 가사와 육아, 그 단단한 얼음덩이가/매일 덮칠지라도 절망하지”말자며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느낌을 기록할 것/생존의 알람 시계가 절박하게 울어도 꿰뚫고 갈 것”을 다짐한다. ‘기꺼이 하는 일엔 행운이 따르죠’에서는 “잘될 거야, 잘되고 말 거야!”라고 외친다.

그러나 수많은 이별이 슬픔을 만들고, 수많은 눈물은 사람을 만들어간다. 괴로움도 각목처럼 단단해지면 그것에 얽매였던 때가 시시해 보이는 법이다.

눈물과 괴로움으로 단련된 신씨는 ‘아무것도 아니었지’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알아/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이라고 노래한다. ‘서른아홉, 나는 무얼 찾지?’에서는 “나를 살아남게 하는 부드러운 것/반딧불, 메밀꽃, 드넓은 개펄을 닮은 것”들을 찾고 싶다고 했다. 8년 전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블루스에 빠졌던 여인은 지금은 “나처럼 하얘보시지/펄럭이며 하하하” 웃는 “빨랫줄의 기저귀”(‘이사’ 중)를 바라보는 중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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