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경제 거품인가 아닌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1929년 10월23일.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FRB) 는 다음과 같은 공식 발표를 했다. "최근 급등한 주가를 놓고 과연 투기적 요인이 작용했는지, 아니면 실적이 반영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주가는 다음날 와르르 무너졌다. 대공황의 시작이었다.

요즘 미국에서 이런 악몽이 재현될 것이라는 '거품 붕괴론' 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칫하면 조정 국면 이상의 경기 하강이 닥칠 것이라는 '거품 경계론' 만 꾸준히 나오고 있다.

"7세가 넘은 호황은 이미 '노령화' 된 호황이다. 은퇴할 나이가 지났는데 수그러들 기미가 안보이니, 발기 불능 치료제 '비아그라' 에 의존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미 미네소타주 (州)에 본사를 둔 거대 은행 노웨스트가 이번주 초 발간한 보고서의 첫머리다.

여기서 말하는 비아그라는 '넘쳐나는 돈' . 이에 대해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의 찰스 슐츠 연구위원은 "거품은 무슨 거품이냐" 고 잘라 말한다. '주가 하락 가능성' 만을 뺀다면 경제 전체에 거품이 발생했다고 볼 현상은 없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기관들은 지난 1분기 성장률을 연 3.5~4%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해 3.7%에 이어 고성장이 계속되는 셈이다. 여기에다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12월 이후 0.1% 밖에 오르지 않았다.

반면 주식시장 쪽은 사정이 다르다. 지난달 31일 열렸던 FRB 공개시장위원회에서 금리 인상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는 보도가 나옴에 따라 지난 24일부터 사흘동안 뉴욕 증시의 다우지수는 2백44포인트 (2.7%) 빠졌다.

94년 이후의 주가 상승세는 1929년 대공황 이전의 추세와 거의 비슷하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S&P) 500지수에 편입되는 종목들의 주가수익비율 (PER) 은 최근 25배까지 올라갔다.

만일 금리가 올라가면 주가는 꺾일 것이고, 주식에 직.간접으로 투자하고 있는 가계 (현재 전체 가정의 41%) 의 소득.소비가 줄면서 경기 하강의 골이 깊어질 수 있다.

노웨스트 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손성원 부총재는 "돈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은 주가를 부추긴 요인도 되지만 거꾸로 주가가 쉽게 빠지지 않도록 만드는 근거도 된다. 금리를 올려도 주가가 10~15% 이상 하락할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래 봐야 주가는 지난해 중반 수준으로 되돌아갈 뿐" 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시각도 비슷하다. 메릴린치 증권사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브루스 스타인버그는 "주거용 집값은 그동안 물가 상승률보다 덜 올랐고 사무실 임대료가 다소 오른 것은 오랫 동안 공급이 모자랐기 때문" 이라고 지적했다.

또 주가나 부동산값이 그때그때 조정되고 기업 투자 역시 생산시설 확장이 아닌 원가 절감에 집중됐다는 점도 안전판으로 손꼽힌다.

특히 미 은행들이 대출시 부동산을 담보로 받는 사례가 적어 일본식 거품 붕괴는 미국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워싱턴 = 김수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