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안되는 '정리해고'…기업들 노조·정부 눈치보며 변칙 인원감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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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어쩝니까. 구조조정은 해야하는데 정리해고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 최근 1천5백명을 '희망퇴직' 시킨 현대전자의 노화욱 (盧和旭) 인재개발부장은 "감원없이 경비줄이고 구조조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알려달라" 며 이같이 하소연했다.변칙적인, 그러나 '사실상의 정리해고' 성격의 고용조정이 성행하고 있다.

사람을 줄이기는 해야겠는데 정부.노조 압력 때문에 정리해고는 못하겠고, 그러다 보니 많게는 수백억원씩을 추가부담하면서 '명예.희망퇴직' 등의 명분으로 대규모 인력감축을 단행하는 것이다.이런 현상은 특히 대기업 사이에서 심하다.

노동부 산하 중앙고용정보관리소에 따르면 올 1~2월중 2만1백9명이 정리해고로 회사를 떠났지만 대부분 중소기업에서 이뤄진 것이다.또 21일 현재 18개사가 노동부에 정리해고를 신고했지만 이중 종업원수가 1천명 이상인 곳은 세진컴퓨터랜드 한곳 뿐이다.

3백인 이상도 대구 매일신문이 유일하고 나머지는 모두 중소기업이다.

금융계도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이후 1만5천여명이 직장을 떠났으나 회사가 문을 닫은 일부 종금사를 제외하곤 정리해고는 없었다.H기업 인사담당자는 "제도적으로는 정리해고제가 도입됐지만 정부가 워낙 강하게 눈치를 주는데다 회사 이미지 훼손 등을 감안해 대기업들은 이 제도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면서 "그렇다고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D그룹 노사담당 간부는 "공장을 놀리면서도 휴업수당은 줘야하는 마당에 정리해고를 하겠다고 노조에 통보하면 실제 해고시점까지 60일동안 노조반발을 견딜 재간이 없다" 며 "이러다간 함께 망할 판" 이라고 말했다.이에 대해 민주노총 윤우현 (尹于鉉) 정책부국장은 "대기업에서 강압적인 권고사직.직종변경.지방발령 등에 의한 인원정리가 이뤄지고 있다" 며 "이는 정리해고와 다름없다" 고 주장했다.

노동계도 5, 6월 본격화할 단체협상때 고용안정협약 체결을 요구,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총파업도 불사한다는 입장이다.그러나 이로 인해 노사갈등이 심해질 경우 외국인투자유치를 비롯한 국내기업의 구조조정에 심각한 걸림돌이 될 것이란 우려가 높다.

전경련 최정기 (崔頂基) 경쟁력강화팀장은 "30대 그룹에서 2백여건의 기업이나 사업매각협상이 진행중인데 인력조정이 최고 관건" 이라면서 "정부는 기업에 대해 구조조정과 해고 자제중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둘지 분명히 해줘야 할 것" 이라고 지적했다.

민병관·이훈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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