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부도·고금리에 의욕상실 '창업'엄두도 못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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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H섬유업체 부장으로 재직하다 올해초 명예퇴직한 朴모 (45) 씨는 20여년간 직장생활을 마감하며 2억여원에 달하는 퇴직금과 위로금을 받았지만 아직 새로운 사업에 손을 못대고있다.

퇴직하면서 받은 목돈으로 원사 제조공장을 세워 반듯한 사장님으로 독립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사업가 친구들이 연쇄부도로 쓰러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 당분간 은행에 돈을 넣어놓고 금리도 높은데 이자로만 생활하기로 했다.

지난해 8월 금융기관에서 퇴직한 李모 (47) 씨도 3억여원에 달하는 퇴직금과 위로금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무엇을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그저 경기가 나아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제조업은 경험이 없어 엄두가 안나는데다 식당이나 대리점을 해보려고 이곳저곳을 알아봤지만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로 내수 (內需)가 꽁꽁 얼어붙어 하던 장사도 안되는 것을 보고 마음을 접은 지 오래다.

이처럼 IMF한파 이후 새로운 기업이나 법인을 세워보겠다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창업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 경기침체와 내수부진으로 기업마인드가 오그라들면서 기업창업의 위축현상이 제조업에서 벤처기업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이같은 현상은 통계에서도 드러나 한국은행과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IMF한파가 몰아친 지난해 12월 이후 3개월동안 전국 7대도시의 신설법인수는 모두 4천2백15개사로 1년전 같은기간 (5천2백7개사) 보다 19%가 줄어들었다.

같은기간중 부도법인은 3천4백26개사로 1년전 (1천2백43개사) 보다 2.8배가 증가했다.

이에 따라 부도법인수에 대한 신설법인수의 배율도 96년 5.0, 97년 3.4에서 올 1월에는 1.1로 줄어들어 창업부진현상이 풀리지 않을 경우 조만간 사상 처음으로 부도기업수가 신설기업수를 웃도는 사태까지 나타날 전망이다. 벤처기업 창업의 근간이 되는 벤처캐피털의 투자조합결성도 올들어 아직까지 1건에 그쳐, 벤처창업투자 역시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대학동기생과 컴퓨터 부품관련 벤처기업 창업을 준비해온 李모 (27) 씨는 "자본이 없는 만큼 돈을 빌려 창업을 해야 하는데 금리가 너무 높은데다 향후 전망도 불투명해 당분간 포기한 상태" 라고 말했다.

최근 실직자와 퇴직자들이 쏟아지면서 한국생산성본부의 경우 올들어 4월까지 지난해 같은기간보다 6배 가까운 7백여명이 창업교육을 수강하는 등 각종 창업교육 과정마다 사람들이 몰리고 있지만 아직까지 창업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경기침체와 고금리가 지속되면서 사업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시중금리 이상의 수익률을 올리기가 힘들어지면서 창업에 대한 위험부담이 높아져 이같은 창업부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생산성본부 강기영 전문위원은 "종전에는 퇴직과 동시에 새로운 창업이 곧바로 이어지는 경향이었으나 최근에는 창업준비기간이 길어지고 실물경기회복때까지 관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전반적인 창업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 설명했다.

홍병기·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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