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 고속철]중.무엇이 잘못됐나…공사비·기간조차 예측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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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경부고속철도사업을 둘러싼 논쟁거리는 대략 일곱가지다.22조2백92억원 이상으로 늘어난 총 사업비 규모가 그 첫째고, 잦은 설계.사업 변경으로 무한정 늘어난 공기가 그 둘째다.

대구~부산간 직선화 여부 등 노선문제와 평균운행시속 논란, 중앙역 선정이 그 뒤를 잇고 대전.대구구간의 지상.지하화 논쟁도 숙제다.마지막으로는 사업을 추진할 재원 및 경제성에 대한 재무.수익성 문제를 들 수 있다.

해묵은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해온 고속철도 사업은 4무 (無) 정책이 빚은 결과다.즉 주인과 철학이 없는 상태에서 공개행정과 재원마련 정책까지 실종되다보니 땜질식 처방이 남발됐다.

◇ 철학 부재 = 고속철도사업을 조망하는 국가적 차원의 '철학 부재' 가 가장 큰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때론 정치적 인기를 위해, 때론 부처간 주도권 다툼 속에서 사업을 다루다보니 고속철도사업으로 국가가 추구할 이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됐다.

노선 논란과 차량선정 지연, 재무성 결여 등은 모두 철학 부재가 양산한 문제다.차량 도입 계약을 한 지 4년이 지났고 이달중 마산항구에 들어올 TGV 2호는 이미 태평양을 건너고 있지만 당초 선진국으로부터 이전받겠다던 고속철도 기술은 넘어온 게 없고 여객 위주의 정책은 물류개선책을 뒤로 밀었다.

독자기술로 해외로 진출하겠다던 당초 포부는 사라졌으며 실적위주의 부실공사로 애써 해외건설에서 쌓은 신인도만 갉아먹었고 잊을만하면 한번씩 터지는 잦은 시비는 호남.동서 고속철도로 연계되는 종합교통망 구축은 아예 엄두도 못내게 해버렸다.

◇ 공개행정 부재 = 고무줄처럼 늘어난 사업비와 공기는 사업초기부터 잉태된 문제지만 이를 털어놓고 국민과 함께 해결방안을 찾기보다 비밀행정 속에서 편법 계산을 동원해 눈가림해온 결과다."사회간접자본 확충사업은 경제성만을 놓고 평가할 수 없다" 는 신임 이정무 (李廷武) 건설교통부장관의 고백이 차라리 솔직한 것임에도 역대 정부는 경제성을 입증하려 장래 수요를 부풀리고 사업비를 누락시켰다.국민적 공감대 없이 억지춘향식으로 사업비를 줄이다 대전.대구구간 지상.지하화 논쟁이 촉발됐고 중앙역 문제는 여전히 미정상태. 편법을 쓰다보니 용산역~남서울역 (시흥) 간 공사비와 지하역 등 건설비는 2기 서울지하철 공사비 기준으로도 2조원에 달하지만 2기 사업으로 슬쩍 미뤘고 93년 수정계획시 개통 후 건설한다며 제외한 차량정비창 시설비용 3조원도 사실상 누락된 셈이다.

경주노선 변경에 따른 추가 투자비도 4천5백억여원에 달하는 동해남부선 이설비용 등 7천억여원이 빠진채이고 3천6백억원대의 연결선 비용과 5천억원대의 공단운영비용도 간데없으며 개통시기 지연으로 예상되는 수조원대의 차입금 이자 부담도 숨어들었다.

◇ 재원조달책 부재 = 어이없게도 감사원이 계산해낸 22조2백92억원의 사업비는 고사하고 지난해 9월 계산한 사업비 17조6천억원에 대한 재원조달 방안조차 확정하지 못한채 정권이 교체됐다.2차 수정계획이 그대로 확정될 경우 정부가 45%의 사업비를 부담해야 하지만 항공료와 엇비슷한 요금으로 고소득층이 이용하게 될 고속철도를 위해 수십조원의 국민 세금이 쏟아부어져야 하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감사에서도 지적됐듯 20년후 투자비 회수가 막연한 상태에서 사업초기부터 눈덩이처럼 불어날 사업 적자는 누가 부담할 것인지도 논의의 대상이다.루이스 버저사의 맥도널드 책임연구원은 국회 증언을 통해 2차 수정계획대로 고속철도가 건설돼도 개통 초기 수익은 약 3조원대로, 이는 2조원대의 운영.정비비와 2조5천억원대의 이자.원금 상환에도 못미치는 수치라고 밝혔다.

고속철도가 매년 약 1조5천억원씩 적자를 내면 결국 4인가족 기준 가구당 7만원씩 추가부담을 지거나 서울~부산간 편도요금이 40만원대 이상으로 책정돼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 사업주체 부재 = 주체가 불분명하다보니 당시 예산을 쥐고 있는 재경원과 통산부.건교부.과기처 등 관계부처에 철도청.고속철공단까지 주도권을 다투다 문제가 생기면 서로 네탓으로 치부해왔다.고속철도 추진조직은 출범초기 관리직이 전체 인력의 53%를 차지, 전문성이 결여됐음에도 오히려 기술자 이탈만 가속화하는 양상이다.

전문성이 없다보니 자문을 맡고 있는 외국 회사만도 벡텔사 등 5개사지만 역시 책임소재가 불명확하다.벡텔사의 경우 사업자문을 담당하고 있지만 사업비.공기 변경에 대해 어떤 역할이나 책임도 지지 않아왔으며 시스트라사는 도면을 본국으로 보내 검증하는 체제다보니 사업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된다.

뒤늦게 97년 사업관리 자문계약을 책임계약으로 전환, 1백명 이상의 외국 기술자들이 지원될 계획이지만 이 경우 건교부 고속철기획단이나 고속철공단은 무슨 일을 맡고 최종 결재권자는 누가 될지 걱정하는 전문가가 많다.결국 무주 (無主) 고속철도의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각 부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외국회사를 방패막이로 삼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범정부적 추진 주체를 새로 구성하는 것만이 면피성 정책추진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음성직 교통전문위원·권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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