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녀, 도시 한복판에서 표류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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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호 06면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무수히 늘어선 빌딩과 한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다리 그리고 그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로 뒤덮인 도시의 공간 속에 밤섬이 있다. 그런데 이 섬을 지나치면서도 그 속에 누가 살고 있을지 궁금해진 적이 있나? 밤섬은 그래서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푸르름과 고요한 외모 역시 현실 속의 초현실을 연상케 한다.

영화 ‘김씨 표류기’, 감독 이해준, 주연 정재영·정려원

딱히 밤섬까지 갈 것도 없다. 아파트 숲에서도 방문만 걸어 잠그면 완벽히 현실과 차단된 비현실의 삶이 가능하다. 문 밖에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누구도 말 걸지 않지만 인터넷으로 누구의 행세를 하고 누군가와 댓글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14일 개봉한 이해준(36) 감독의 ‘김씨표류기’는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밤섬과 방 안이라는 공간 속에서 고립되어 사회적으로는 ‘살아있지 않은’ 두 남녀의 희한한 만남을 관찰한다.

사채 빚에 몰려 자살하려는 남자 김씨(정재영)는 한강에 뛰어들지만 밤섬에서 살아난다. 빌딩 숲에, 지나가는 유람선에 구조를 요청해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억울한 현실 속에서 묘한 삶의 의지가 살아난다. 자장 수프를 보며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희망에 사로잡힌 남자는 새똥을 묻어 밀알을 싹 틔우겠다는 일념으로 밭을 갈고 물을 뿌린다.

분투하는 남자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 여자 김씨(정려원)는 3년간 방을 벗어나지 않은 폐인이다. 망원렌즈 속에서 남자를 발견한다. 그에게 와인 병 속에 메시지를 담아 던져 보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작은 소통이 시작된다.

한강 가운데서 표류를 당한 남자의 섬 생활이나 방 안에서 쓰레기더미를 쌓아 놓고 사는 여자의 모습, 그리고 두 사람이 외계인과 지구인의 만남처럼 조심스럽게 교류를 가진다는 설정과 상황은 모두 황당한 판타지일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비현실은 도시와 지척에 있는 섬이나, 안온한 아파트 안에 자리 잡은 동굴 같은 방처럼 현실과의 거리를 멀리 두지 않는다. 주인공 역시 사채로 이어진 자살, 왕따와 소외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한다.

그렇게 맞닥뜨려진 현실과 비현실은 아이러니를 낳는다. 서울의 섬에서 느껴지는 대양의 무인도 같은 격리감. 죽음을 넘어서자 사라지는 빚과 현실의 고통. 작은 것에 싹을 틔우려는 삶의 의지. 서로가 누구인가를 가장 궁금해하지만 막상 ‘당신은 누구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한마디 대답도 할 수 없는 텅 비어 있는 자아. 그 대신 자신을 채우고 있는 사이버 이미지들과 숫자들. 구조를 요청했지만 사람이 나타나자 도망가 버리는 남자.

영화 속을 지배하는 이 아이러니는 그러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아무와도 이야기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건져 올릴 수 있다는 긍정의 아이러니가 된다.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부터 남들 앞에 빛나 보이는 사람들보다는 조용히 머물러 있는 주변인에 대한 애정을 보여줬던 감독의 두 번째 영화는 무관심과 절망 속에 섬처럼 버려진 현대인들이 서로 등대가 되어 빛을 비춰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간 무심했던 밤섬을 한번쯤 돌아보게 되고, 옥수수 씨를 뿌려 싹을 틔워보고 싶어하며, 어디선가 누군가가 흔드는 손이 반가움의 표현인지 구조의 요청인지 좀 더 깊게 들여다볼지 모른다. 가려져 있는 현실을 환기시키고, 버려지고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의 온기는 훈훈하다.

아쉽다면 ‘캐스트 어웨이’를 패러디한 것 같은 남자의 에피소드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초반부에 비해 여자의 에피소드는 공감의 지수가 다소 떨어진다는 점. 남자를 구해내고 그를 만나려고 하는 간절한 이유에 대한 논리가 끝까지 일관성 있게 밀어붙여지지 않아서인 듯하다. 마지막까지 두 사람의 랑데부에 영화의 마지막 목표점을 설정해 놓았지만 에피소드식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흐름이 끝까지 영화에 집중하게 하는 힘도 조금은 약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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