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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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제2장 길위의 망아지

철규는 변씨를 남겨두고 버스터미널로 달려갔다.

터미널 근처 공터에 주차해둔 용달차가 저만치 바라보였다.

운전석 핸들 위에 고개를 처박고 엎뎌 있는 봉환을 발견했지만, 적재함은 비어 있었다.

코다리명태를 싸 두었던 덮개까지 보이지 않았다.

차에 남겨두었던 물건을 몽땅 도둑질당한 것이다.

액수로 따지자면, 얼추 40여만에 가까운 물화였다.

용달차 뒤쪽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들을 눈여겨보는 장꾼들은 아무도 없었다.

손바닥만한 시골장터에서 난전꾼의 물건을 탈취해가는 사례는 드문 일이었다.

그런 행패가 있어 왔다는 소문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방심에 허를 찔린 것이었다.

한 개피의 담배가 모두 탈 때까지 철규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봉환을 볼 면목이 없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장터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철규를 발견하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도둑질당한 것을 발견하는 길로 봉환과 태호는 장터 근처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전혀 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다.

"봉환이 선배는 두 분이 자동차에 와서 물건을 지키고 있는 줄 알았대요. 구색을 맞춰놓으려고 물건을 가지러 왔었는데, 어떤 놈이 덮개에서 몽땅 싸갖고 튄 모양이에요. 장터 뒷골목까지 뒤져봤지만,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네요. " "우리 물건에 특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찾는다는 건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만한 부피를 훔쳐가려면, 적어도 세 사람 이상의 패거리였겠지. 근처에 숨어서 우릴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어. 예사스럽게 행동해. 당황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 게 좋아. 신고했어?" "아직 신고 안 했어요. " "신고하지마. 깨끗하게 포기해. 우리가 떠들고 날뛰면, 소득도 없이 창피만 당할 거야. 이 곳 장꾼들이 저지른 짓이 아니란 짐작 때문이지. 물건의 가치에 탐이 났다기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관찰하고 싶은 건 아닐까. 평창장에 정나미가 떨어져 두 번 다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거야. " "봉환이 선배가 폭발 직전이에요. " 철규가 봉환을 달래보기로 하고 태호는 좌판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폭발 직전에 있다는 봉환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데는 별다른 곤욕을 치르지 않았다.

그도 철규처럼 빚어진 사태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고해 보았자, 파출소 출입만 뻔질날 뿐이었고, 찾는답시고 읍내를 들쑤시고 다닌다는 것도 결과가 싱겁게 되긴 마찬가지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선지는 몰라도 엉뚱한 곳에서 노닥거린 철규와 변씨의 허물을 애써 들춰내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보란 듯이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파장이 될 때까지 좌판을 지키며 장사를 계속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주문진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로 했던 계획은 포기하기로 했다.

자동차를 여관방까지 몰고 들어갈 형편이 못된다면, 자동차까지도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질 무렵에 평창을 떠나 북상해 대화에서 묵었다.

이튿날엔 아침 일찍 출발해서 진고개에서 점심밥을 먹을 때까지 그러나 봉환과 변씨는 도대체 말이 없었다.

떠나올 때는 주문진에 혼자 남겨둔 윤종갑을 헐뜯고 의심했는데, 지금은 처지가 바뀌어 무슨 면목으로 그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지 대책이 없게 되었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세 사람의 살돈에서 몰래 벌충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오후에 주문진에 당도했는데, 윤종갑은 마침 진부령에 있는 황태덕장으로 가고 없었다.

그들 덕장에서 출하될 황태의 시세를 먼저 탐지하러 간 것이었다.

엘니뇨의 징후가 뚜렷해지기 시작하면서 오징어는 철늦게까지 잡히고 있었지만, 동해태의 어획고는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3월에 출하가 시작될 황태의 시세가 벌써부터 들먹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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