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세상 자살 급증…실업대책·'따뜻한 사회' 회복 급선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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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극심한 경제불황과 무더기 실직사태 등 우울한 사회현실을 반영한 각종 병리현상이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다.

사업에 실패하고 일자리를 잃어 졸지에 집없는 거지 신세가 되고 어린 자녀를 팽개치는가 하면 심지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도피수단을 택하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갑작스런 경제난의 충격으로 우리 사회에 집단우울증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며 사회차원의 대비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서울 용산전자상가내 인터폰 제작공장에서 프레스공으로 일하며 칠순 노모와 함께 생활해온 이영수 (李永洙.39) 씨는 두달전 공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졸지에 실업자가 되자 25일 오후 서울용산구 남영역 구내로 들어오던 전동차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같은 날 오후엔 서울마포구망원동 한강 둔치에서 金유영 (33.경기이천시모가면) 씨가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한강으로 투신해 숨졌다.

金씨 역시 5일전 경기도이천 도자기공장에서 해고당한 뒤 낙심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실직한 아버지의 모임 (대표 金正大)' 이 실직자 1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81%가 불면증에 시달리고 29%는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해 이들의 심리적 공황상태가 심각한 상태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실직의 고통이 가장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25일 서울동대문구청량리동 H아파트에서 발생한 여중생 4명의 집단자살도 일부 학생이 4개월동안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등 집안형편이 주요 원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28일에는 林모 (29.여.인천시서구마전동) 씨가 남편의 실직으로 생활이 어려운 것을 비관, 어린 두 딸에게 극약이 든 우유를 마시게 한 뒤 함께 음독자살했다.

부스러기 선교회 (원장 姜命順)가 26일 서울.인천 등 수도권 지역 초중고생 3백94명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중.고생의 11.5%, 초등학생 8.1%가 가난을 이유로 자살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나미 (李那美) 씨는 "최근 들어 자살이 평소에 비해 30%이상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며 "생활고와 어려운 경제사정 등으로 너나할 것 없이 집단우울증을 앓으면서 현실도피 수단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 말했다.

실직자와 그 가족들의 무료 상담을 위해 전국대학 심리학자들이 참여하는 '심리학 봉사단' 을 4월 발족시킬 예정인 연세대 이훈구 (李勳求) 교수는 "실직 가정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6백만~8백만명의 한국인이 정신과적인 문제를 갖게 된다" 면서 "정부는 물론 민간인들이 실직 가정을 돕는데 앞장서야 한다" 고 밝혔다.

정제원·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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