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는 건 다 시킨 엄마 거기에 정작 아이의 뜻은 빠져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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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보기에는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중산층 가정. 그러나 소통이 되지 않는 가족. 대개 아이의 사춘기와 함께 찾아오는 관계 단절의 위기는 어느 가정에나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이의 사춘기 탓만 하며 넘기기엔 자칫 부모·자녀 사이에 돌이키기 힘든 거리감이 생길 수 있다. 현명한 대처 방법은 무엇일까. 공부 개조 프로젝트팀은 “잔소리와의 전쟁에 아이도 엄마도 지쳤다”며 사연을 보낸 최희원(42·서울 송파구)씨네 집을 찾았다.

“다 저 잘되라고 그러는 건데 도무지 따라와 주질 않아요. 학원이다 과외다 시켰던 것도 별 효과가 없었고요. 가족끼리 외식하자고 해도, 여행을 가자고 해도 다 싫대요.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고 게임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아이를 보면 속이 타들어 가죠. 점수가 뚝 떨어진 성적표가 나와도 제가 더 노심초사예요.”

정우진(15·잠신중3)군의 어머니 최씨는 심경이 복잡하기만 하다. 몸이 불편한 첫째를 신경 쓰느라 둘째인 우진이를 잘 돌봐주지 못한 것 같아 늘 미안한 마음도 있다. 하지만 최씨 가정의 희망이 바로 우진이라는 생각에 자꾸 욕심을 부리게 된다. 최씨는 미안한 마음과 보상심리를 교육열로 표출했다. 학원·과외는 물론 자기주도 학습 센터 등 좋다는 것은 다 시켰고, 좋은 교육 환경을 찾아 지난해 8월 경기도에서 서울로 이사 왔다.

하지만 우진이는 점점 힘들어하기만 했다. 초등 때까지는 상위권이던 성적도 계속 떨어졌다. 대치동 학원에서 밤 11시가 넘어서야 들어온 뒤엔 숙제나 공부는 제쳐두고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거나 잠을 잤다. 그런 모습을 보는 최씨는 조바심에 아이를 다그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최씨는 “말수가 무척 적고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지 않는 내향적인 아이와 적극적이고 철두철미한 제 성격이 궁합이 잘 안 맞는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진이(오른쪽에서 둘째)도 엄마·아빠도 행복해지길 온 가족이 간절한 희망을 촛불에 담아 기원했다. [황정옥 기자]

한국판 맹모삼천 … 그 결과는

프로젝트팀이 대화를 나눠본 결과 우진이도 답답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진이는 “학교 수업은 진도가 빨리 나가서 따라가기 버거웠다”며 “수업 시간에 혼자 교과서를 읽거나 다른 과목 숙제를 하곤 했다”고 털어놨다. 최씨가 주변 소문을 듣고 보낸 영어 학원의 수업도 지루하기만 했다. 밤 늦게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고 매번 나머지 공부를 하다 보니 귀가 시간은 더 늦어졌다. 우진이는 “학교에서도 계속 졸렸다”고 말했다.

박재원 소장은 “대한민국의 많은 학생이 우진이와 같다”며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환경과 경험들에 의해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즐거운 놀이기구도 경험에 따라 무섭고 싫은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 역시 위기 상황에 대한 방어적 본능의 측면이 강하다는 것. 우진이는 공부가 재미없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이란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행복하지 못한 상태다. 학교·학원·가정에서의 생활이 답답하고 공부가 재미없다 보니 게임·TV에도 빠지게 된 것으로 프로젝트팀은 분석했다.

참기와 다른 방법 찾기의 차이

박 소장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선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성적이 떨어지고 공부를 못하는 원인을 ‘아이가 안 하기 때문’으로만 돌리고 질책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우진이에게도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함께 방법을 찾아 가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우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씨는 “사실 몇 번 아이를 놓아두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며 “하지만 성적이 너무 뒤처질까 봐, 수행평가 점수가 깎일까 봐 불안한 마음에 참고 기다리지를 못했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포기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참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는다고 생각하셔야 한다”고 조언했다. 부모는 학원을 보내는 역할이 아니라 아이에게 힘을 보태서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프로젝트팀은 아버지의 역할도 강조했다. 진단 결과 우진이가 아버지에 대한 불신감이 다소 있다고 하자 아버지 정규철(46·은행원)씨는 깜짝 놀랐다. 평소 아이와의 친밀감이 여느 가정보다는 낫다고 여겨 왔기 때문이다. 이에 프로젝트팀은 한 조사에서의 흥미로운 결과를 알려주었다. 일주일 동안 아버지와의 대화 시간을 묻는 질문에 아버지들은 7시간이라고 답한 반면 아이들은 7분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정 내 관계에 대한 입장차를 보여주는 결과다. 박 소장은 “아버지가 변화돼야 한다고 해서 갑자기 집에 일찍 들어와야 한다는 건 아니다”며 “아이를 인격체·파트너로 받아들이며 아이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금 환경을 감사해보라

강인환 교사는 “적당한 거리 유지가 중요하다”며 아이를 마냥 놔두면 방치가 되지만 적당한 간격은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또 강 교사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토론 문화를 만들어 볼 것을 권했다. 거창한 이슈가 아니더라도 용돈의 액수를 정하는 문제나 서로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벌칙을 주는 등의 주제를 놓고 논리적인 이야기를 이어가 보는 것이다. 강 교사는 “점차 아버지가 잘 아는 분야인 경제나 시사 관련 토론으로 연결된다면 우진이의 공부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멘토 김효중씨는 우진이에게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의 깊은 관심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감사하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우진이네는 우선 컴퓨터와 TV 시청 시간을 줄일 방법을 의논하기로 했다. 우진이는 서점에 가서 어떤 책이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학원에 대한 결정도 우진이에게 맡길 예정이다. 지난 중간고사에서 80점을 받은 과목이라면 기말고사에서는 85점을 목표로 잡는다. 15점은 틀리자는 생각으로 공부하면 마음의 부담이 한결 가벼워진다.

최씨는 “그동안 좋다고 하는 자녀교육법은 안 해본 것이 없었는데 정작 우진이의 의사는 빠져 있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며 후회했다. 정씨 부부가 다짐했다. “앞으로 공부에 대해 신경 쓰기보다 우진이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할게요. 우진아, 잘해 보자.”

최은혜 기자, 사진=황정옥, 최명헌 기자
우진이 엄마의 고백
부모의 기대가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 이제서야 헤아려 봅니다

우진이 어머니 최희원씨는 “가족 모두의 행복을 위해 달라지겠다”고 약속했다. [최명헌 기자]

저는 올해 고3인 큰아들과 중3인 작은아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입니다. 큰아들은 올해 20세, 지체장애 1급으로 누구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힘들답니다. 20년 동안 몸이 불편한 형에게 늘 엄마를 내준 둘째 우진이는 말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며 투정도 잘 부리지 않는 착한 아들입니다.

우진이는 저희 집의 꿈나무였죠. 둘째지만 첫째 같은 아들, 엄마의 기대주…. 아이가 33개월일 때 어린이집을 보내면서부터 교육에 열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살 땐 큰아이 휠체어를 끌며 우진이 손을 붙잡고 백화점 문화센터의 영어교실을 보내기도 했고요. 유치원 때도 영어 동화 교실이니 뭐니 하는 것을 모두 시켰고, 초등학교 입학 후 최근까지 학원·과외·자기주도학습 등 안 시켜본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일까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상위권에 속하던 아이 성적이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처지기 시작했습니다. 학원을 다녀도 별 성과는 없었고요. 그러다 보니 아이는 자신감도 잃고 무기력해져만 갔습니다. 꿈도 없다고,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이 공부를 위해 저도 많이 노력했습니다. 학원 설명회 참석, 부모교육 강좌 수강, 자녀교육서 탐독 등. 이론은 정말이지 빠삭합니다. 하지만 정작 내 아이는 왜 생각처럼 되지 않는 걸까요. 마음을 졸이다 화병이 다 생길 지경이었습니다.

경기도 구리시에 살다 우진이 하나만을 위해 교육환경이 좋다는 잠실로 이사온 지 이제 10개월 정도. 대치동으로 학원을 보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우진이에게 잘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아이를 지치게 한 것 같아 미안할 따름입니다. 부모의 기대가 얼마나 부담스러웠을지 아이의 마음도 이제야 헤아려 봅니다.

‘열려라 공부’가 나오는 수요일이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신문을 읽으며 ‘내게도 이런 행운이 올까’ 싶었는데 이렇게 상담을 받게 돼 참 기쁩니다. 사실 처음에는 고민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신문에 나간다는 것에 대해 회사 생활을 하는 남편보다 제가 더 망설였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줄 알고 있을 지인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식을 위한 일인데 어느 부모가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우진이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를 일인데….

우진(左)이와 형 형진군

아이도 처음에는 신문에 자신의 사진이 실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사실 저는 우진이가 이번 프로젝트를 받아들여준 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마음입니다. 내성적인 우리 아들에게 형이 돼줄 멘토가 생긴 것도 든든합니다.

늘 그렇듯 머리로는 다 알지만 문제는 실천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가족 모두의 행복을 위해 달라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욕심을 놓지 못하는 버릇들이 자꾸 튀어나오지만 그래도 노력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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