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6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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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살까말까 주저하며 서로 귓속말을 나누다가 냉정하게 돌아서고 말았다.

변씨나 봉환이었다면,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었지만, 철규에겐 아직 그런 넉살이 없었다.

변씨와 봉환은 조금전부터 젓갈전 가장자리로 비켜서서 입씨름들 하고 있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고, 그 사건을 가지고 또한 끊임없이 입씨름을 벌였다.

그러나 멱살잡이 하고 피투성이를 만드는 꼴을 보이지는 않고 있는 것이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다.

그들이 걸핏하면, 삿대질로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내막이 대개는 삶의 본질에 심각하게 접근해 있는 문제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만간 그런 사소한 아귀다툼도 제풀에 시들해질 것이었다.

오히려 그런 갈등이나 마찰을 통해서 서로의 내심을 좀더 깊이있게 관찰하고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화해의 시간이 빠를 수 있다는 기대도 해볼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철규는 처음부터 끼어들지 않고 못들은 척하고 있는 것이었다.

힐끗 젓갈전 쪽으로 눈길을 돌렸는데, 한동안 서로의 콧등이라도 비틀어 물 것같이 다투고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씻은 듯이 보이지 않았다.

근처의 난전 주위를 꼼꼼하게 둘러보았는데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희끗희끗 긋고 있던 아침나절의 눈발도 시늉만 하다가 그치고 말았다.

그 대신 추위가 옷소매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좌판 뒤에 피워놓은 난로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시들어가는 불길을 내려보고 있자니, 문득 누군가가 보고싶었다.

그는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며 누가 보고싶으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딱이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그러다가 정민 (韓貞玟) 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혼을 앞두고 있었던 아내와의 갈등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전혀 앙탈을 부리거나 말이 없었던 딸의 태도는 한결같이 매몰스러웠다.

부부가 갈등을 보일 경우, 대개는 어느 편을 들어 화해를 이끌어내려 노력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정민은 어느 편이긴커녕 완벽하리만치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려 하였다.

물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적도 없었다.

그 정민이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순간, 그 아이가 가슴 쓰리도록 보고싶었다.

그는 꺼져가는 난로 속에 나무토막을 집어넣었다.

문득 그를 부르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스라쳐 벌떡 몸을 일으키는데, 조금전 물건 값만 물어보고 지나쳤던 두 여자가 좌판 앞에 서 있었다.

둘 중에서 키가 작고 몸집이 통통하게 생긴 여자가 추위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

"아저씨. 이제보니 동업자들이 있던데요?" "예. 일행이 셋인데…. 지금은 잠깐 어디들 가고 없네요. " "없긴요. 저쪽 식당 앞에서 진을 치고 섰던데요. 흥정만 하고 명태는 사지 않았다고 꾸지람 많이 듣고 다시 쫓겨왔지 뭐예요. " "괜찮습니다.

부담스런 물건을 살 수야 없지요. 멀리서 좌판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죠? 어디로 튀어버렸나 했는데, 거기서 바람까지 잡고 있었다니 기특한 동업자들이군요. " "그거 두 코다리만 주세요. " 통통하게 생긴 여자가 털소매 밖으로 작고 하얀 손을 내밀어 동지태를 가리켰다.

이마까지 내려 덮이는 모자 달린 털점퍼를 입었으면서도 두 여자는 베란다 밖으로 쫓겨난 애완견처럼 시종 발발 떨고 있었다.

철규는 물건을 포장할 동안만이라도 추위를 달래라 하고 쬐고 있던 난로를 내주었다.

그러나 포장한 물건을 건네받은 뒤에도 두 여자는 냉큼 갈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마침 난로의 불땀이 벌겋게 되살아나서 선뜻 비켜나기가 아쉬웠던 탓이었다.

철규는 두 여자를 난로가에 남겨두고, 식당 앞에 놓여 있는 자판기로 가서 커피 두 잔을 뽑아 들고 돌아왔다.

받아든 종이컵에서 커피 냄새를 맡은 여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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