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황석영씨 사면복권 "창작에만 전념 하겠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작가 황석영 (黃晳暎.55) 씨가 마침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89년 3월 방북 이후 5년에 걸친 사실상의 망명, 그리고 93년 4월27일 모국어의 곁으로 돌아와 5년여의 영어생활 끝에 풀려난 것이다.

黃씨가 나오던 날 고은.현기영.이시영.황광수.이영진.강형철.김남일씨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인 30여명이 아침부터 마중나와 출소를 기다렸다.

13일 오후2시쯤 공주교도소 문이 열리며 그가 나타났다.

오랜 수형생활 탓인지 머리는 거의 반백이 됐으나 예의 활달하고 호방한 기질은 여전해 출영나온 문우들과 어우러져 교도소 문앞의 썰렁한 분위기를 데웠다.

문인들은 그에게 두부를 권했다.

함께 온 黃씨의 장남 호준 (26).딸 여정 (23) 씨는 격앙된 표정으로 아버지를 얼싸안았다.

쾌활한 黃씨의 눈에는 엷은 물기가 배었다.

시인 고은씨는 즉석에서 '귀석 (歸石)' 이라는 호를 지어줬다.

이제 그만 풍운을 가라앉히고 안정된 생을 살라는 뜻이다.

- 수감생활은 어떠했나. "석방설이 있을 때마다 힘들었다.

하루빨리 독자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어느덧 5년이 흘렀다.

무엇보다 몸도 갇혀있지만 작가적 상상력도 갇혀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

- 감옥생활이 작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10년간 우리 현실로부터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 거리감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내 아들 또래의 대학생들이 수감돼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흐른 것도 실감했지만 아직 민주화가 덜 돼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소설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 북한에 들어갔을 때와 현재의 북한을 바라보는 심정은. "방북 당시 나의 절실한 입장은 민족화해였다.

분단시대 작가로서 닫혀진 그 반쪽의 실체도 보고 싶었다.

그 반쪽을 보는 행운과 불행을 한꺼번에 겪은 셈이다.

IMF 공략을 받는 동아시아의 현실에서 동시에 경제적 위기를 겪는 남북한 관계는 이제 좀더 화해와 협력이 가능한 환경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차제에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면 좋겠다."

- 앞으로의 작품 활동은. "내가 겪은 많은 것들은 내 개인의 것이자 분단된 우리 민족 전체의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이 앞으로의 작품들을 통해 어떻게든 구체화되지 않겠는가.

정치.사회적 활동은 자제, 창작에 전념하겠다. "

黃씨는 "광주 항쟁 이후 18년의 긴 여행을 끝내는 느낌이 든다" 면서 깊은 감회에 잠긴 뒤 환영 문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특유의 너털웃음 속에 서울로 향했다.

공주 = 이경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