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박사의 IMF 건강학]2.오늘 하루 넘기느라 내일 포기해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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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발등에 불도 급하지만 겨우 젖 좀 나온다고 모두가 덤벼들어 빨아먹기만 했다.

당장 내 배가 급한데 언제 어미소 살찌울 생각까지 하랴. 이게 우리다.

내일 생각을 못한다.

우유를 팔아 더 좋은 목초지를 사고, 풀밭을 가꾸고 보다 나은 관리기술을 개발하는 등 장래를 위한 투자를 해야 하는데 우린 그럴 여유도, 생각도 없다.

당장 급하다고 빨아 먹기에만 급급했다.

일꾼들은 품삯을 올리라고 데모하고, 관은 관대로 앞다리 뒷다리 뜯어 먹고 목장 주인은 뒷주머니를 챙기고…. 결국 젖소는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만다.

이것이 한국경제의 현주소다.

농촌에도, 공단에도 굳게 닫힌 시뻘건 철문들이 오늘의 우리 경제를 증언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비틀거리는 젖소를 살찌워야 하는데 발등에 불이 급한 우리 체질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당장 급한 형편에 무슨 한가한 소리, 거두어 먹이기도 쉽지 않으니 아예 잡아먹기로 작정한 것 같다.

불행히 이게 목장이나 공장에서의 일만은 아니라는데 심각성이 있다.

위기를 맞은 것도, 그리고 이 위기에 대처하는 것도 우린 그저 발등에 불 끄기에만 급급할 뿐 내일을 생각하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이 기질은 먼 옛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구차스런 유산이다.

산골에 묻혀 척박한 땅을 일궈 살아야 했던 우리는 하루 살기만으로도 급급했다.

거기다 근세에 들면서 잦은 외침, 정변, 6.25, 그리고 최근 우리 사회의 급작스런 변화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일은 내일이고 - ."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련해서도 아니고 운명론자도, 낙천가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 하루 살기에 벅찬 나날이었다.

해서 우리 뇌리에는 이런 의식이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다.

더욱 불행은, 형편이 어려우면 우린 그만 완전히 근시안이 된다는 점이다.

마치 오늘 하루 살고 말 사람 같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좀 춥다고 담장을 뜯어 군불을 지필 순 없지 않은가.

요즈음 우리 사회 전체가 마냥 하루살이 인생 같다.

큰 기업, 작은 장사 할 것 없이 급한 오늘 하루 넘기느라 헐값으로 다 내놓았다.

'80% 세일' 이란 요란한 광고가 사실이라면 내일은 장사 문닫겠다는 소리로밖엔 달리 들리지 않는다.

발등에 불도 급하지만 먼 산에 불 날 조짐은 없는지 눈을 들어 멀리 보며 걷자.

이시형〈강북삼성병원 신경정신과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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