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혁명이 아니라 선거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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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년 전 이맘때 YS정부는 용팔이 사건을 규명한다며 안기부를 파헤쳤다.

문민정부라는 이름에 눌려 정치인.공무원.군인.금융인들은 새 정권의 눈치보기에 바빴다.

청와대 참모들은 이를 두고 무혈혁명 상황이라고도 하고 역사를 바꾸는 일이라고도 했다.

지금 북풍 (北風) 공작 규명으로 안기부가 다시 수난에 들어갔다.

정부조직개편과 국제통화기금 (IMF) 파동이 겹치기는 했지만 공무원.군인.금융계에 정권교체에 따른 물갈이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정의 (定義)에 따라 상해 임정 (臨政) 의 유일 계승론이 나오고, DJ 납치사건 등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숨을 죽이고 전전긍긍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눈을 부라리며 위압하는 쪽이 생긴다.

정치보복이니 표적사정 (司正) 이니 하는 얘기도 똑같이 나오고 있다.

선거에서 이긴 쪽이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라면 과장.국장급까지도 승자의 지역이나 연줄이 독식하는 경우는 선진민주국에는 없다.

TK (대구.경북)가 물러가면 PK (부산.경남)가 들어서고 이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다시 MK (목포.광주)가 채워진다.

공무원사회는 5년마다 지연.학연에 따라 뭉치기와 줄대기가 밀물과 썰물처럼 일어나고 이에 맞추어 사 (私) 기업도 새 세력과 색깔을 맞추려고 아첨성 인사까지 한다.

나라가 몽땅 뒤집히는 듯하다.

정권을 잡는 쪽은 언제나 급진적인 변혁의 유혹에 빠진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은 취임초 "돈 있는 사람이 고통을 받도록 만들겠다" 고 말했다.

결국 금융질서 정상화를 위해서보다 남의 주머니를 들여다보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

전교조와 노조의 정치활동 문제는 단순한 정책 선택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의 이념적 좌표가 결부된 사안들이다.

나름으로 이유가 있어서 국민적 합의에 의해 이를 금지시켜 왔는데 새 정권 출발과 함께 무너져 가고 있다.

재벌 개혁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수십개의 계열회사들을 3~6개씩으로 줄이라는 급진적인 처방이 나오고 있다.

변혁을 실현하는 방식도 다분히 초법 (超法) 적이었다.

YS정부는 취임초 법에도 없는 재산공개를 시도하면서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의 위험을 지적하자 "법이 문제가 아니라 국민이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며 묵살했다.

여론의 지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였으며 실제 이 지지를 근거로 밀어붙였다.

문제를 제기하는 쪽은 개혁에 반발하는 수구 (守舊) 세력으로 몰았다.

여론과 국민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민중주의적 독재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는 왜 집권초기만 되면 이렇게 사회전체가 요동을 치며 뒤숭숭한가.

왜 미래에 대한 비전과 꿈은 뒷전으로 가고 사정 (司正) 이 어떻고, 보복이 어떻고 하며 살벌해지는가.

이런 식의 정권교체가 계속 반복된다면 나라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이런 유형의 정권교체가 반복될까. 민주주의는 평화적 정권교체로 집약될 수 있다.

선거의 승패와 관련없이 나라가 평상시와 같이 평화롭게 굴러가고 비록 정적 (政敵) 이었다 할지라도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

법과 규칙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고 개인 인권은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이런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혁명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선거라는 제도를 인류는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선거를 통해 집권은 하지만, 집권을 하자마자 의식은 혁명가로 변하는 것은 아닐까. 혁명에서 패자는 반역자, 혹은 수구세력이라는 이름으로 격리되고 도태된다.

인민의 지지와 정의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제도와 법은 유린된다.

민주적 선거의 결과는 이와는 다르다.

패자의 권리도 승자와 같이 존중되며 법과 규칙은 만인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표를 찍었건 안 찍었건 똑같은 권리와 기회를 보장받는다.

흔히 쇠는 달궈졌을 때 때려야 한다며 정권초기에 급진적 변혁을 주장하기도 한다.

YS정권에서 보았듯이 초기의 변혁조치들은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왜 그럴까. 혁명을 한 게 아니고 선거를 한 것인데 혁명을 한 것으로 착각해서 현실을 도외시하고 과욕을 부린 탓은 아닐까. 새 정부는 이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문창극〈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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