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닫힌 '금융저수지' 돈 안돈다…부도날까 대출·투자 기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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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돈이 금융권 안에 고인 채 좀처럼 기업자금으로 흘러들지 않고 있다.

은행은 부도를 염려해 대출을 꺼리고 투신사는 늘어난 예금을 콜시장에서 많이 굴리고 있어 예금주와 기업을 이어주는 금융기관의 자금중개기능이 현저히 위축되고 있다.

이에 따라 실세금리가 다소 안정세를 보이고 있는데도 5대 그룹을 제외한 기업들은 대출은 물론 기업어음 (CP).회사채 발행이 차단돼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다.

1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투자신탁업계의 수신고는 지난해말 87조원에서 지난달 1백조원을 돌파한 데 이어 지난 5일 1백1조원을 웃도는 폭증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은행.신탁계정을 합한 은행의 수신고는 지난해말 3백75조7천억원에서 지난 5일 3백71조9천억원으로 두달새 3조8천억원이나 줄었다.

특히 신탁계정의 경우 신종적립신탁 폐지의 여파로 수신고가 지난해말 1백93조원에서 1백86조7천억원으로 6조3천억원 가량 급감했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기업에 대출해주거나 기업이 발행한 CP.회사채를 사들일 재원이 모자라는데다 한은마저 자금흡수에 나서자 단기자금 시장에서 투신사들로부터 콜자금을 빌려 쓰고 있다.

투신사들도 예금주들의 중도해지에 대비해 유동성을 확보하려고 기업들이 발행한 장기채권에 대한 투자비율을 줄이는 대신 급전을 구하는 은행.종금사.증권사들을 상대로 단기자금 시장에서 주로 돈을 운용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금융권에 모인 돈이 기업으로 흘러들지 않고 있는데다 금융권 내에서도 단기 부동화 (浮動化) 하고 있다" 면서 "이 때문에 금리가 다소 내렸는데도 기업들의 자금사정이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 고 말했다.

더욱이 6대 시중은행을 포함한 14개 은행이 국제결제은행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8% 위로 높이려고 기업대출이나 유가증권투자 등을 줄일 계획이어서 앞으로도 기업들에 돌아갈 몫은 더욱 줄어들 전망이다.

이와 함께 투신사들은 삼성.현대 등 5대 그룹 회사채나 CP를 골라 매입하고 있고 이들 기업도 자금시장 경색에 대비해 미리 돈을 비축해 놓고 있어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자금사정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한편 직접자금시장 또한 꽁꽁 얼어붙기는 마찬가지다.

올들어 주식시장의 기업공개.유상증자 물량은 지난 5일 현재 1백88억원에 불과하고 회사채도 발행물량의 90% 이상을 대기업들이 차지하는 실정이다.

특히 상당수 중소기업들은 금융기관 대출은 물론 회사채.CP 발행마저 제대로 안돼 사채 (私債) 시장에서 연 50%를 넘는 초 (超) 고리로 돈을 끌어다 쓰고 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은행들이 돈을 타금융기관의 고금리 상품에 넣어 놓거나 주로 한은의 통화안정증권이나 환매조건부채권 (RP) 등을 매입하는 데 쓰고 있다" 며 "은행의 기업대출 기피 풍토가 사라지지 않으면 돈은 계속 금융권 안에서 맴돌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헌재 신임 금융감독위원장은 '금융권의 중개기능 회복' 을 취임 첫 과제로 삼고 중소기업 자금난을 해소할 별도의 시장메커니즘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홍승일·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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