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경원 칼럼

북한에 부드러워진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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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난번 본 칼럼에서도 지적했지만 최근에 북한의 태도가 부드러워진 것 같은 인상이다. 그런데 미국도 북한에 대한 태도가 부드러워진 것 같다. 지난 6월 말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개최됐던 6자 회담에서 미국은 북한이 싫어하는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배려를 했다.

*** 신보수 세력 입장 약화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먼저 폐기해야만 북한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협의할 수 있다고 해왔다. 그런데 이번 6자회담에서 미국은 북한이 핵 폐기를 약속한다면 북한이 요구하는 조건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리고 있는 아세안 안보포럼(ARF)에 참석한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북한 외무상이 만나 현안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역시 파월의 태도는 상당히 부드러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이 부드러워진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는 전략목표와 그들이 놓여 있는 상황, 특히 경제적 여건에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북한에 대해 비교적 강경했던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부드러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미국 대통령 선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부시 대통령은 지금부터 선거하는 날까지 온 세상이 평온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여당 후보는 세상이 평온해야 유리한 법이다. 동북아시아, 그리고 한반도에서 부시 대통령이 바라는 것은 어떤 위기상황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민주당 후보 존 케리는 북한 핵문제에 대해 북한과 직접 협상하겠다는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부시는 왜 미.북 협상은 안 되는가 하는 이유를 일반 국민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설명하기 어려울 바에는 차라리 부시 행정부가 케리의 주장을 선취해 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물론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시도되고 있지만 지난번 6자회담 이후부터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미국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미국 내의 강경파라고 할 수 있는 신보수 세력의 입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선을 앞두고 중도온건파에 힘이 실어졌다고 볼 수 있고 바로 이런 미국 대통령선거의 현실은 부시 행정부를 부드럽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국제적 현실도 미국을 부드럽게 만든 요소가 된다. 6자회담은 미국이 제의해 만들었지만 6자회담의 분위기는 미국에 유리하게만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이 6자회담의 틀을 이용해 미국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 명백해졌다. 지난 6월 말 회의에서 미국은 북.미대화, 핵협상 절차 문제 등에 대해 신축성있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공을 북한 쪽으로 날려 보냈다. 이제는 북한이 공을 쳐야 할 차례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대북협상에 부드러운 자세를 취함으로써 한국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북 정책을 조정해준 셈이다. 어떻게 보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라크 파병계획을 취소하지 않고 일관되게 밀고나가는 한국정부에 대한 미국의 고마움을 표시하는 뜻도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여튼 미국의 대북자세의 조정은 한국으로서는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 북한이 공을 쳐야 할 때

그러면 북한 핵문제는 드디어 해결될 것인가. 아직도 낙관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우라늄 문제와 핵의 평화적 이용 문제, 그리고 사찰 문제 등 기술적 측면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술적 문제 말고도 과연 핵무기를 포기할 것인가 하는 북측의 정치적 의지가 문제다.

만일 북한이 미국 측의 협상안을 거부한다면 미국의 반응은 매우 강경할 수 있다. 한국.일본 등 우방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도 미국 측 협상안을 비판하기 힘든 만큼 미국은 운신의 폭이 커졌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북한은 엄청난 오판을 할 수 있다. 우리도 대책을 생각해야 한다.

김경원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