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문화혁명]6.컬트는 내친구…"관객석 박차고 무대위로 올라라"(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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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영국 런던의 문화 중심지인 웨스트 엔드 지역의 레스터 플레이스 골목에 자리잡은 프린스 찰스 영화관. 매주 금요일 밤 11시30분에만 상영되는 영화가 있다.

'록키 호러 픽처 쇼 (The Rocky Horror Picture Show.줄여서 RHPS)' . 영국 극작가 리처드 오브라이언이 만든 뮤지컬을 바탕으로 75년에 짐 샤만 감독이 연출한 1백분 짜리 영국영화다.

감독은 이 영화말고는 더이상 눈에 띄는 작품을 남기지 못한 사람이다.

'델마와 루이스' '데드맨 워킹' 등으로 우리 눈에 익은 수전 새런든의 젊은 시절 모습말고는 별로 알려진 배우의 얼굴도 볼 수 없다.

이런 영화가 지금도 깃발을 내리지 않고 매주 금요일 밤이면 꾸준히 관객들의 열기를 불러 모으고 있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 12번가 빌리지 이스트 극장, 로스앤젤레스 UCLA인근의 누아트 극장, 산타 모니카의 래믈 극장 등 전세계의 젊은 문화 중심지에는 한결같이 이 영화가 주말 밤에 상영되고 있다.

문제는 이 영화의 용도가 상영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공연이 함께 한다.

영화를 공연하다니?

자, 'RHPS' 가 상영되는 금요일 밤 심야 극장의 은밀한 어둠 속으로 들어 가보자. '쉬 밥 (She Bob)' '위 갓 더 비트 (We Got the Beat)' 등의 하드록 음악으로 극장 안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여기저기 괴상한 차림을 한 남녀가 나타난다.

남자가 입술과 눈썹 화장을 진하게 한 것만 해도 놀라운데 거기다 밴드가 달린 스타킹 차림까지 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온몸을 뽀얗게 분칠하고 근육질을 자랑하며 다닌다.

모두 등장인물의 차림새를 흉내낸 것이다.

이런 밤의 열기 속에 이윽고 'RHPS' 의 프리쇼가 시작된다.

극장 스크린 바로 앞, 좁은 공간에 한 남자가 나타나 마이크를 잡는다.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연습을 조금 해야합니다.

" 먼저 욕설 연습. 연방 "웃기지 마" "나쁜 자식" "집어치워라" "말도 안돼" 등의 고함을 퍼붓는다.

영화 속에 나오는 낯간지러운 대사나 장면을 야유할 때 써 먹을 것이란다.

마지막으로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콘테스트를 벌인다.

'가장 숫처녀처럼 보이는 사람' '가장 섹시하게 주인공 의상을 입고 나온 사람' 등을 관객의 박수소리를 기준으로 뽑는 것이다.

뉴욕과 LA에서는 '가장 진짜처럼 엑스타시의 신음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 을 뽑는 짓궂은 행사도 한 바 있을 정도다.

모두 영화내용과 관련이 있다.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마구 터지고…. 무대 위와 무대 아래, 보는 자와 보여주는 자의 구분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분위기다.

이윽고 영화가 시작된다.

그런데 맙소사, 극중 인물과 똑같이 차려입은 사람들이 스크린 앞에서 영화장면을 그대로 립싱크로 흉내내고 있다.

이 기묘한 행동이 '컬트현상' 의 한 형태이다.

컬트. 소수의 열광하는 팬들이 특정작품을 숭배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동시에 수동적으로 영화 속의 내용물만 받아만 먹었던 관객들이 스스로 몸을 움직여 '문화 속으로' 뛰어든 문화반란 현상을 의미한다.

괴상망칙한 복장과 분장, 섹스와 외계인, 노출과 자극적인 록음악으로 가득 찬 가치전복적인 분위기의 해괴한 영화 'RHPS' .이 영화는 개봉 때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주말 심야극장으로 옮기면서 오히려 고약함을 무기로 지나치게 매끈한 정규영화.기성문화에 식상한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다시 극장으로 돌아가 보자. 'RHPS' 의 현장은 스크린 앞에서 영화장면을 연기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신랑.신부가 하객들의 쌀 세례 속에 퇴장하는 장면이 나오자 관객들은 준비한 쌀을 서로에게 마구 던진다.

비 오는 장면에선 물총을 쏘기도 한다.

등장인물이 허튼 소리를 하자 관객들은 거침없이 아까 연습한 욕설을 스크린을 향해 쏘아댄다.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고 모두 일어서서 율동하고 고함을 지른다.

여기저기서 개인적인 추임새가 요란하게 튀어 나오면서 심야극장은 현실과 영화가 모호하게 뒤섞이는 괴상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뉴욕의 퍼포먼스에서 한 배역을 맡아 참가한 토니 임보넌 (18) 은 "지난 2년간 영화를 1백 번도 더 봤는데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길이 없어 퍼포먼스에 참가했다" 고 밝혔다.

컬트현상을 빚는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 , 데이비드 린치감독의 '이레이저 헤드' 등 수십 편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대한 컬트현상은 단순히 흉내내기 같은 퍼포먼스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접한 순간부터 거의 평생 동안 영화가 제공하는 독특한 세계를 가슴 속에 지니고 자신의 삶에 체화시키는 개인적 컬트현상도 많다.

예로 '카사블랑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고혹적인 남녀관계를 평생 생활의 지표로 삼는 고전컬트족도 적지 않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비디오 리바이벌 출시, 관련지역 관광과 기념품 판매 등이 큰 문화시장을 형성하기도 한다.

광적인 숭배 분위기에서 '돈냄새' 를 맡은 영화제작자들은 처음부터 컬트영화를 지향하면서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처음에 하나의 지역적 소비현상에서 출발한 컬트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도한 흐름을 이뤄 이제는 전세계적인 문화현상으로 자리잡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컬트가 전세계의 젊은이를 열광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바탕에는 "문화란 더 이상 남이 주는 감동을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이젠 능동적으로 즐기면서 만들어가는 것' 이라는 혁명적인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문화 생산물에 갖가지 반응 - 욕설.고함.춤.율동.흉내내기.생활의 양식으로 자리잡기 등 - 을 나타내는 관객들은 문화를 즐김과 동시에 참여함으로써 새롭게 생산하고 있다.

컬트는 이제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주말 심야극장에 '킹덤' 이라는 기괴한 영화가 상영되면서 컬트현상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으며 문제의 'RHPS' 도 국내업자에 의해 지난해 수입돼 개봉시기만 엿보고 있다.

굳이 집단적인 반응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열광하면서 자기만의 컬트를 지니고 사는 문화 소비자도 많다.

소비하면서 창작하는 시대가 은밀히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컬트는 이제 특정 소비층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의 친구로서 다가오고 있다.

글 : 뉴욕·LA·런던 = 김상도·정명진·채인택/사진 : 런던·뉴욕 = 최승식·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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