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5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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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두 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저만치 변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타나기만 하면, 몽둥이찜질이라도 시킬 듯 벼르고 있던 봉환이가 시뻘게진 눈에 볼멘소리로 변씨를 나무랐다.

"형님 어디갔다 인제사 얼굴을 삐쭉 내밉니껴?" 변씨는 봉환의 말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되받았다.

"나? 커피 한 잔 하고 왔어. " "어디가서 커피를 마셨길래 두 시간 이상 걸렸어요? 좌판 피는 놈 따로 있고, 물건 파는 놈 따로 있다 이겁니껴?" "이 사람이 초장부터 왜 자꾸 볼멘소리가 낭자한가.

나로 말하면, 자고로 커피에 인이 박여서 아침나절에 한 잔 안 마시면, 하루 종일 속이 메슥거려서 헛구역질이 나는 사람이여. 옛날 서울생활 할 적엔 하루에 열 잔은 마셔야 속이 든든했어. " "저기도 자판기가 보이는데, 어디 가서 마셨길래 인제사 나타나요. 서울까지 가서 마시고 왔습니껴?"

"어디긴 어디야 다방이지. 자판기는 무슨 가당찮은 자판기야. " "뭐 다방요? 형님 시방 올곧은 정신 가지고 하는 소리라요? 형님이나 나나 우리 같은 주제꼴에 다방 의자에 가랑이 벌리고 앉아서 커피 마셔도 손가락질 안받겠습니껴? 옛날 말에 짚신에다 국화꽃을 그린다 카디, 형님 오늘 아침에 노는 꼴이 꼭 그짝이네요. 우리 형편에 자판기 커피면 됐지, 다방커피가 가당키나 합니껴. 그런 정신 가지고 산다면, 장차 우리가 얼마나 지탱을 하겠습니껴. " 봉환의 말도 새겨들어볼 만한 얘기다 싶었던 철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한 주먹 쥐어 박힌 처지가 된 변씨는 그러나 무안당한 꼴이긴커녕, 눈까지 시뻘게져서 봉환의 속좁은 안목을 나무라고 들었다.

"허, 천삼백원짜리 뜨물 같은 커피 한 잔 마시고 큰 허물 잡히겠네. 임자, 억하심정이 아니라면, 좋은 일 하고 온 사람에게 게거품 물고 대들지 말고 내 말 들어봐. 봉평 장터의 시세를 알자면, 겉핥기라도 이 고장 풍속을 알아야 하고, 풍속을 알자면, 이 고장의 토박이들을 상종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산중 고을에도 명색 유지들이 있게 마련이고, 할일 없는 시골 유지들이 아침나절에 꼬이는 곳이 바로 다방이란 곳이여.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들 하고있나 싶어 다방을 찾아갔고 다방에 가면, 으레껏 커피 한 잔 마시게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여름에 개는 왜 잡나? 개고기 먹으려고 잡는 것 아녀. " "그런 변명 하지 마소. 내가 형님 속셈을 모르는 줄 압니껴? 도망간 여편네가 여기 어디 있는가 해서 이 골목 저 골목 남의 축담이나 기웃거리다가 인제사 돌아온 것 아닙니껴? 하루빨리 외장으로 나가자고 고집부린 게 모두 속셈이 있었던 기라요. " "허, 이거 생사람 잡네. 임자가 봉평장꾼들이 죄다 듣고 있는 한길바닥에서 날 창피 주려고 아주 작정을 한 게야? 내가 뒤늦게 그 화냥년을 왜 찾아?" 두 사람 모두 저울에 달아봐도 기울 것이 없는 다혈질이었다.

입씨름을 바라보고만 있다간 멱살잡이까지 갈 것 같은 낌새를 느낀 철규가 얼른 나서서 변씨에게 물었다.

"다방에선 뭐가 있습디까?" 대답할 변씨는 뜸을 들이느라 담배를 피워 무는데 화증을 삭이고 잠자코 있어줘야 할 봉환이가 얼른 대답을 가로챘다.

"형님도 참 딱하시네요. 저 형님이 무신 소득이라도 있었으면, 혀가 짧아서 아직까지 말을 안했을 낍니껴. 주문진에서 하필이면, 봉평으로 오자고 부득부득 우겨대던 까닭을 나는 벌써 알고 있었다 카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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