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출판] 'De Gaulle Mon Pere'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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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Gaulle Mon Pere(1,2권)
필립 드골·미셸 토리악, Plon, 각권 24유로
“프랑스의 패배는 일시적이며 레지스탕스의 불꽃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치욕적인 나치 점령으로 독일의 허수아비가 된 비시 정부를 거부하고 1940년 6월 17일 런던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은 다음 날 BBC방송을 통해 독일에 맞서 레지스탕스 투쟁을 선언한다. “나, 드골장군은… ”으로 시작하는 이 방송은 꺼져 가던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에 불을 붙였고 국민적 자부심에 눈뜨게 했다. 위대한 ‘골리즘(드골주의)’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드골의 대장정은 이때 시작됐고 결국 그는 44년 8월 26일 종전 하루 전에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영웅이 됐다.

드골이 숨진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 서점가에 다시 골리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10월 발간된 『내 아버지 드골』 1권에 이어 올 2월에 나온 2권이 역사서 부문 베스트셀러 1,2위를 다투고 있다.

이 책은 샤를 드골의 아들이자 상원의원인 필립 드골(82)과 언론인이자 작가인 미셸 토리악이 일문일답 형식으로 드골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1,2권을 합쳐 본문만 1065쪽에 달하는 초대형 인터뷰인 셈이다. 전기 작가가 혼자 스토리를 구성할 수도 있었겠지만 독자들을 대신해 궁금증을 던지고 즉답을 얻는 형식이 오히려 현장감과 재미를 더해준다.

드골의 삶은 프랑스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1차대전을 최전선에서 겪었고, 2차대전 때는 영국으로 탈출해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대통령으로 알제리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위기 때마다 프랑스 역사에는 항상 드골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토리악은 서문에서 10개월에 걸친 인터뷰 기간 내내 녹음기를 켜놓고 “필립 드골의 침묵까지 녹음했다”고 쓰고 있다. 아울러 “드골 장군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아들의 이야기는 바로 드골이 한 이야기”라며 이 책이 살아있는 프랑스 현대사임을 강조했다. 가족 사진과 드골의 비망록, 그리고 가족 및 유명 정치인들과 주고 받은 드골의 서신도 공개돼 사료적 가치를 더한다.

토리악은 영웅의 숨겨진 모습을 추적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인간 드골은 때로는 자상한 아버지로, 때로는 소박하고 청렴한 정치인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독일군에 대한 기억과 아내 이본에 대한 기억, 그리고 알제리를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겪은 우익 측의 암살 기도 등 가족사와 프랑스 현대사가 책 속에 교차하고 있다.

드골은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가족과 함께 야외로 소풍 갈 때에도 꼭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이었다. 잘 웃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들에게 훌륭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필립 드골은 아버지가 어린 자기를 서커스장에 데리고 가 춤추는 곰을 보며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던 모습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드골의 가장 큰 매력은 권력에 연연하지 않은 점이었다. 그는 국민이 자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마다 지체없이 권좌에서 물러났다. 46년 총리 때는 “즈 퀴트”(나 물러나오)라는 두 단어만을 남긴 채 자리를 떴고, 69년에는 비서실장에게 “나는 공화국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마감하네. 오늘 정오부터 발효야”라는 전화 통고 하나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 전화는 고향 콜롱베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거만하면서도 초연한 듯한 드골의 ‘무욕’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필립 드골이 밝히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비밀은 드골의 초연함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드골은 항상 죽음을 생각한 위인이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음을 늘 마음 속에 새기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그의 고찰은 청소년기에 갓 진입한 18세때 자신이 쓴 시에 이미 나타나 있다.

“내가 죽을 때/ 그 시간이 저녁무렵이었으면 좋겠네(…)
하늘로부터 밤과 평화가 함께 내려오려는 시각(…)
내 침대 머리맡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조국을 볼 수 있을 저녁 무렵(…)”

드골은 숨지기 3년 전인 1967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그즈음 그의 비망록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부쩍 많아졌다. 필립 드골은 그해 독일연방공화국(옛 서독) 초대 총리였던 콘라드 아데나워 등 아버지의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도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고 쓰고 있다.

드골은 그가 시에 쓴 희망대로 저녁 무렵에 숨을 거두었다. 죽음을 강하게 예감하고 3년이 지난, 1970년 11월 9일 저녁 7시35분이었다. 장례식은 52년 일찌감치 남긴 그의 유언대로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고, 프랑스 중동부 콜롱베의 마을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가 숨을 거둔지 33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는 왜 다시 드골에 열광하는 것일까.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구관’이 생각나고 옛날 얘기가 잦아지면 현재가 어렵다는 뜻이라고 했다. 진정 프랑스는 지금 위기에 빠져들고 있는가.

지난해 가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의 몰락을 경고한 책 한 권을 놓고 국가적인 찬반 논쟁이 거세게 일었다. 니콜라 바브레가 쓴 『추락하는 프랑스(La France qui tombe)』가 그것으로 유력 일간지 르 몽드는 이를 계기로 ‘프랑스 몰락론 논쟁’을 연재하기도 했다. 이 책은 몰락의 원인으로 공공부문이 비대해지고 국가기능이 강조된 프랑스의 ‘사회국가주의’시스템을 꼽았다.

굳이 바브레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프랑스 사람들은 오늘의 프랑스가 옛날 드골 시대만큼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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