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FM 99.9MHZ 인기프로 '조경서의 음악느낌'…매니어들 갈증 싹 풀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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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1시간에 딱 3곡. 노래 한곡당 대개 3분이니까 60분 중 고작 9분 - .방송량의 15%만이 노래에 할애되는 셈이다.

무슨 얘기냐고?

요즘 FM라디오의 음악프로들이 내보내는 노래 양이다.

CM을 빼고 30~40분이 몽땅 진행자의 입담에 바쳐진다.

시시콜콜한 연예가 화제, '오늘은 왠지' 따위의 유행어 반복, 미리 각본을 짜놓고 벌이는 청취자와의 전화놀음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쯤 되면 음악프로가 아니라 음악을 양념으로 걸친 '구라' (이야기) 프로란 표현이 옳다.

FM의 황금시절이던 80년대, 1시간에 적어도 10곡씩은 나오던 시절과는 사뭇 다르다.

마이크의 주인공 역시 박원웅.김기덕 같은 전문DJ 대신 서세원.이문세.이본 등 개그맨.MC.탤런트로 바뀐지 오래다.

왜 이렇게 됐나. 한마디로 '말' 이 음악을 먹은 것이다.

음악보다 개그 위주의 프로가 인기를 끌자 청취율 지상주의의 방송사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몰렸다.

TV에 이어 FM마저 개그에 뺏긴 음악 팬들로서는 성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대안 (올터너티브)' 이 되는 프로는 없나. 약간의 기술적인 장치만으로 집안에 사설방송사를 차려 해적 방송을 해대는 영화 '볼륨을 높여라 (Pump up the Volume)' 의 크리스찬 슬레이터처럼 통제할수 없는 자유와 반항의 시간을 던져주는 문제아들은 없는가.

언더그라운드.컬트 음악 매니어들은 해방구가 되어줄 전파를 갈구한다.

지난해 12월2일 개국한 경기방송 (FM99.9㎒) 의 심야프로 (매일 자정~새벽2시) '조경서의 음악느낌' 은 매니어들에게 '한 대안' 한다.

(경기방송은 '한~' 표현을 너무 자주 써 방송위원회로부터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다) .삼척MBC라디오에서 음악프로를 맡아오던 DJ 조경서 (31) 씨가 PD.작가.진행자를 도맡은 '원맨 프로' .메이저방송들이 외면해온 언더그라운드.제3세계 음악과 이제는 클래식이 된 70~80년대 명곡들이 하루 평균20곡씩 흘러나온다.

핑크플로이드의 명반 '위시 유 워 히어' 가 통째로 40분간 방송되는 반면 말은 짤막한 노래소개뿐, 음악광이 아니면 다이얼을 고정시키기도 어렵다.

조씨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흔해빠진 인기곡이나 말장난을 듣고싶으면 다른 채널로 돌려도 좋다는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특히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대한 각별한 배려로 이 프로는 '언더동네' 의 메카가 되었다.

매니어들은 지난 밤 이 프로에서 나온 음악을 매일 화두로 삼고있다.

델리스파이스.코코어.모하비 등 개성있는 '지하실의 목소리' 들이 두터운 팬층을 만들고 있다.

공중파에서 듣기 힘든 '하드코어' 곡들도 심심치않게 나온다.

육체에 대한 자학적 묘사로 메이저방송에서 퇴짜를 맞은 허벅지밴드의 '뜯어먹어 날' 이 방송된 것은 언더동네에서도 화제가 됐다.

지방방송이지만 여전히 공중파인 경기FM은 자체심의보다는 PD의 양식에 선곡권을 맡긴다.

조씨는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는 표현도 전체 흐름상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면 틀고 있다.

항의가 들어오더라도 설득할 자신이 있기 때문" 이라고 소신을 밝힌다.

방송 석 달 만에 그의 '음악느낌' 은 경기FM의 간판프로로 떴고 날마다 청취자들의 반응이 폭증하고 있다.

매일 10여명의 언더 음악인들로부터 방문을 받는 인기인이 됐다.

"아저씨 프로를 듣지 않으면 학교에서 얘기가 안 통한다" 는 여고생의 엽서가 비일비재.

"한 시간에 다섯 곡도 안 나오는 방송을 들으며 속상해 울기도 했는데 아저씨 프로가 생기면서 갈증이 풀렸고 중독증세까지 생겼어요. 개편 때 저희의 똘망한 눈을 기억해 제발 살아남아 주세요. "

법적으론 서울이 가청권이 아니지만 성능좋은 라디오로 듣는 서울의 젊은이들은 일종의 특권의식도 엿보인다.

'조용한 혁명' 을 일으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조씨는 척박한 국내음악방송 풍토에 대해 말한다.

"좀더 독립적인 소규모 라디오가 많이 생겨야합니다.

새 정부가 북한방송도 단계적 청취를 허용한다는데 우선 저출력FM같은 인디라디오 설립부터 자율화해줘 장르별.세대별로 다양한 음악이 흘러다니는 문화를 만들어야죠. "

그런 방송문화가 정착될 때까지 당분간 조씨의 실험은 계속돼야 할 것 같다.

글 = 강찬호 기자·사진 = 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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