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게 띄우는 편지]억울한 국민 없게 부디 공정하십시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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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통령 취임을 축하합니다.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룩함으로써 우리의 민주적 역량이 전 세계에 과시되고, 그동안 당하신 고난과 억울함이 충분하게 보상되며, 망국병의 하나인 지역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가 마련된 것 등 당선 그 자체에 이미 상당한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IMF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신 지도력도 국민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는 국민의 이런 지지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고 또 어렵습니다.

경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치.사회.문화.교육 그 어느 분야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경제 위기가 우선 꺼야 할 불이란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너무 몰두하신 나머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문제들을 소홀하게 하실까 걱정입니다.

정부의 본래 임무는 정의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시민사회로 접어들면서 개인과 집단들이 모두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고 거기서 엄청난 이해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것들을 잘 조정하고 해소해서 힘이 합쳐지기만 하면 우리 사회는 매우 잘 굴러갈 것입니다.

바로 그 역할을 정부가 해줘야 합니다.

이제까지 경제성장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어도 질서확립에 성공한 정부는 없었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법과 제도가 상존하고, 공권력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고 있어 억울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정치계와 법조계의 비리가 사라지지 않고 경찰과 검찰이 불신을 받는 한 공정한 사회질서는 결코 확립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경제위기도 상당할 정도로 정의롭지 못한 법과 사회질서에 기인합니다.

누구보다 억울함을 많이 당해보신 대통령께서는 법과 제도를 정의롭게 고치고 정치계와 공권력의 부패를 과감히 제거함으로써 약자와 소외집단들이 보호받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날로 증가하는 실업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장애인과 같이 이미 고통을 받고 있는 계층은 경제가 악화되면 그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고통 분담에도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익' 의 원칙이 적용돼야 합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과감히 끊으셔서 권력과 돈이 공유될 수 없게 하시고 새로운 특권층이 자리잡는 악순환도 끊어 주십시오. 과거의 대통령들이 '대통령의 의리' 와 '깡패의 의리' 를 혼동해 비참하게 그 임기를 마쳤습니다.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께서도 그런 전철을 밟으실까 크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제일 덕목은 공정성일 것입니다.

우수한 인재는 우리의 유일한 자원이고, 현대사회의 가장 요긴한 자원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나타나는 성과보다 나라의 먼 발전을 생각하는 대통령은 교육을 중요시하고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할 것입니다.

그동안 정부는 교육 투자에 너무 인색했기 때문에 우리 교육은 지금 후진국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교육을 정상화하고 교육자들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과외수업 문제는 오래된 문화적 배경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결코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습니다.

또다시 제도를 바꾸지 말고 시행착오를 거쳐 있는 제도를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의 모든 언행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지대한 교육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십시오. 우리 사회에서 도덕교육의 제일 큰 걸림돌은 정치인들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영화.음악 등 예술과 대중문화에도 관심이 많으시기에 문화계의 기대가 클 것입니다.

물론 평화롭고 자유로운 사회분위기가 예술가들의 창조적 활동에 가장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 문화계가 상업주의에 지나치게 영합하고 퇴폐적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술가들이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순수한 예술성으로만 서로 경쟁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과 제도를 마련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판을 싫어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의 말을 다 듣다가는 '당나귀를 메고 장에 가게' 됩니다만 독선의 결과는 그보다 더 심각합니다.

아부하는 자들을 경계하십시오. 이에 성공한 대통령이 없었음도 명심하십시오.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언론에 너무 아부했기 때문에 언론의 일부가 타락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부디 언론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고 부당한 특혜를 허락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판은 경청하시되 정확하지 못한 보도와 불공평한 비판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그 시비를 따져 언론의 성숙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시민운동이 활발해지도록 공간과 조건을 조성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정부가 다 맡아 하면 효율성은 떨어지고 책임있는 시민운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작은 정부, 국민의 정부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이 활발해지고 시민들의 책임의식이 성장해야 가능할 것입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대통령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손봉호〈서울대교수·사회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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