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무시한 의료행정 환자만 골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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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중환자실 환자를 돌보던 D대학병원 P교수는 최근 환자의 소변을 빈병에 받으라는 병원측 권고에 경악했다.

빈병처럼 외부공기가 통하는 곳에다 검사용 소변을 보게하면 3일도 못가 요로감염이 생기기 때문. 원내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중환자의 요도에 관을 꽂고 이를 무균처리된 비닐주머니 (1만원)에 연결해서 소변을 받아야 한다.

병원측이 이런 비상식적인 요구를 한데는 까닭이 있다.

우선 비닐백은 의료보험비 지불적용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환자에게 따로 비닐백 값을 청구하면 불법이다.

환자의 건강을 걱정하며 병원측에 항의하던 P교수는 결국 "병원도 적자경영을 하는데 환자도 고통분담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진료의사가 비용을 물어주면 별문제 없다" 는 냉소적인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현재 일부 의료용품의 의료보험수가는 이 제도가 시작되던 20여년전 제품에 기초해 수가가 계산돼 있다.

최근 개발된 제품을 사용하면 보험에서 보상받을 수 없다.

이 비용을 환자에게 부담시켜도 불법이다.

최근 일부 병원이 이같은 비용을 환자에게 부담시켜 불법 사기행위로 검찰의 철퇴를 맞은 이후 의료수준이 뒷걸음친 것은 물론 국민들의 건강마저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의료보험법에 따르면 영유아.혈관이 나쁜 노약자.중환자들이 혈관주사를 맞을 때 안전하게 혈관을 잡기 위해 사용되는 플라스틱 바늘이나 나비 바늘은 사용할 수 없다.

환자에게 직접 사오라고 지시하는 원외 (院外) 처방도 불법이다.

보험에서 인정되는 굵은 바늘은 이런 환자들의 경우 혈관이 곧 터져 약물투입이 어렵다.

S대병원 소아과 전문의 C씨는 "일정량의 약물을 혈관에 지속적으로 투여해야 하는 약도 있고, 혈관이 터져 약이 새면 살이 썩는 약도 있기 때문에 바늘사용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는데는 문제가 많다" 고 말한다.

수술때 사용하는 봉합사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에 사용되던 흰실은 10m에 단돈 2천원. 그러나 수술시간 단축.빠른 체내흡수력.흉터를 적게 남기는등 후유증이 거의 없는 검은 실은 60㎝에 2천~7만원이다.

의사가 검은실을 사용하고 비용을 환자에게 부담시키면 역시 불법이다.

이 가운데서 멍드는 것은 결국 의료소비자들. 환자나 보호자는 영문도 모르는 채 위험을 무릅쓰고 싼 치료를 받거나 불법으로 청구된 비용을 물고 있는 셈이다.

연세대 예방의학교실 손명세교수는 "원가 1백원당 65원만 보상되는 현재의 보험수가제도가 결국 변칙진료를 조장한다" 며 "민간의료 비중이 90%나 되는 우리나라 의료시장에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함으로써 의료발전과 의료수준을 떨어뜨리고 있다" 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박기동사무관은 "새로운 의료기술과 의료용품 대부분이 수입에 의존하는 현실에서 보험재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며 "현재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요양급여기준 개선 특별대책위원회' 를 운용,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은 최대한 보험급여에서 흡수하되 불가피한 비급여부분은 당분간 본인부담 허용을 검토하고 있다" 고 말했다.

황세희 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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