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때 오늘

억압과 방임의 극단 피하면서 어린이 보호하는 지혜 찾아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16세기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 브뢰헬(1525~69)이 그린 ‘춤추는 농부’(그림)를 보자. 농촌 마을 축제에서 정신 없이 술에 취한 남녀가 얼싸안고 애정에 탐닉하는 모습 옆에 어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어린이들이 그려져 있다. 어린이들은 독립적 영역 없이 어른들과 함께 섞여 살았다.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아들 루이 13세(1601~43)의 어린 시절에 대한 놀랄 만큼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왕실주치의가 어린 왕세자의 일상생활을 기록해둔 것이다. 브뢰헬의 그림에 있는 어린이들처럼 어린 왕세자는 어른들과 섞여 살았다. 왕세자는 5세 때 간통을 다룬 연극을 즐겼고, 7세 때 도박을 배웠다. 어른들의 난잡한 환경에서 어린이를 격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에라스무스 같은 인문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어린이의 순수성을 지켜 주는 것을 어른들의 의무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방임에서 보호로 바뀐 것이다. 교육기관의 규율은 엄격해졌고,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성적(性的) 위험 요인은 차단됐다. 어린이는 어른과는 다른 본성과 욕구를 지닌 특별한 존재,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분리와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 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어린이·청소년 교육에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 학생들의 복장도 차별화되어 마치 병사나 죄수들처럼 사회적으로 구분되는 유니폼을 착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보호가 지나친 나머지 권위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 강조되고, 억압·규율·배제 등이 교육의 중심 내용이 되는 폐단이 나타났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는 구호와 함께 서양 세계를 휩쓸었던 ‘68혁명’은 400년 동안 누적된 압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196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서양의 기성세대가 민주적 가치를 내면화했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런 배경 덕분이다.

한국 사회는 지난 세기에 소파 방정환 등의 노력으로 어린이만의 독립적 세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나날이 심해지는 입시경쟁으로 온 사회가 사교육 열풍에 휩쓸리게 되면서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억압의 강도는 점점 커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청소년이 인터넷이나 케이블방송의 음란물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어린이에 대한 ‘억압’과 ‘방임’의 두 극단을 피하는 어른들의 지혜가 아쉽다. 오늘은 어린이날, 어린이를 보호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지켜내는 일이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