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11> 천두슈(陳獨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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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대중에게 연설하는 베이징 기독교청년회(YMCA) 회원. 김명호 제공

1915년 9월 ‘신청년(新靑年)’이라는 잡지가 상하이에서 첫선을 보였다. 일본에서 갓 돌아온 36세의 천두슈(陳獨秀)가 주편이었다. 신청년은 개인과 국가의 관계, 외부 세계에 대한 태도, 국민성의 폐단, 전통에 대한 체계적 비판, 개성의 해방, 교육의 목적 등에 대한 토론의 공간이었다. 민주와 과학을 제창하고 중국인의 희망과 한계를 탐색했다. 루쉰(魯迅)도 신청년을 통해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1917년 베이징대 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요청으로 베이징대 문학원장에 취임한 천두슈는 도서관장 리다자오(李大釗)와 함께 ‘매주평론(每周評論)’을 창간해 마르크스주의도 본격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마오쩌둥(毛澤東)·

류사오치(劉少奇)·저우언라이(周恩來)·덩샤오핑(鄧小平) 등 중국의 현실을 이해하기 시작한 신청년들이 도처에 출현했다. 천의 명성은 후스(胡適)와 차이위안페이·루쉰 등을 능가했다. 마오쩌둥도 신청년을 접한 후부터 다른 글들을 멀리했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발생했다. 정부의 굴욕외교가 발단이었지만 천두슈에게는 그간 펼쳐온 신문화운동을 총결산하는 날이며 새로운 출발을 예고하는 날이었다. 신지식인들도 이날을 기점으로 그간의 탐색에 종지부를 찍었다. 분열이 시작됐다.

천두슈와 리다자오는 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21년 7월 직접적인 행동과 엄밀한 조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상하이에 모였다. 중국공산당을 창당한 이들은 천을 총서기에 선출했다. 사람들은 그를 ‘중국의 레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제4차 대회에 이르기까지 중국공산당을 대표했다. 마오쩌둥도 선전부장으로 그를 보좌했다.

천두슈는 인격과 인성과 인정이 불필요한 정치가가 아니었다.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는 혁명가였다. 단순하고 천진난만하며 고집이 세고 완강한, 협객과 문인의 결정체였다. 파벌을 만들지 않았고 만들 줄도 몰랐다. 결국은 일본 간첩으로 몰려 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국민당도 현상금 1만원과 함께 체포령을 내렸다.

1932년 10월 15일 천두슈는 체포됐다. 한 신문은 “공산당은 천두슈에게 상처를 입혔다. 국민당은 상처에 일격을 가해 그를 혼절시켰다”는 보도를 만화와 함께 내보냈다. 소식을 접한 아인슈타인은 “동방의 미래를 좌우할 큰 인물”이라며 석방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버트런드 러셀과 존 듀이도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지금은 공산당의 수령이 아니지만 근년에 발생한 모든 살인과 방화는 그에게서 비롯됐다”며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후스와 차이위안페이가 변호사를 구해 왔지만 천은 “공산당원은 명이 길다”며 거절했다. 돈도 없었다.

천두슈는 8년형을 선고받았다. “문명의 발원지는 연구실과 감옥이다. 두 곳을 오가며 만들어 낸 문명이야말로 진정한 문명”이라던 평소의 말처럼 감옥 안에서 12권의 책을 저술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천은 풀려났다. 장제스는 노동부장을 제의했고 저우언라이는 옌안(延安)으로 가자고 했다. 주미대사였던 후스는 미국에 와서 회고록을 집필할 것을 권했다. 모두 거절한 천두슈는 옛 친구가 있는 쓰촨성 장진(江津)으로 향했다. 빈곤과 병마에 시달렸지만 베이징대 졸업생들 외에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천두슈는 1942년 5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 돼지고기 2근으로 훙샤오러우(紅燒肉)를 만들어 먹은 게 화근이었다. 부음을 접한 장제스는 5·4운동 당일 시위를 주도했던 교육부 차장 편에 조위금 1만원을 보냈다. 예전에 천에게 내건 현상금과 같은 액수였다.

천은 중국의 프로메테우스였다. 해마다 5월 4일이 오면 중국인들은 5·4운동과 함께 그의 이름을 떠올리곤 한다. 천두슈야말로 진정한 신청년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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