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몰이식' 대기업 구조조정, 개혁초점 흐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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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최근 주요 그룹들의 구조조정 계획에 대한 정치권의 요구가 정치논리에 치우쳐 대기업 구조조정의 초점을 흐린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정치권 주문이 대기업 총수의 사재 (私財) 출연이나 대규모 사업 맞교환 (빅딜).정리대상 계열사 확대 등 가시적 조치에만 치중돼 정작 필요한 제도개혁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더욱이 부도율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계열사나 사업부문 정리를 발표할 경우 ▶채권자들의 집중적인 채권회수 ▶대리점 등과의 정상거래 마비 ▶사원들의 동요.생산성 저하 등으로 구조조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만약 정리협상이 실패로 끝난다면 회복불능의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L그룹이 지난 96년 계열사의 한 사업부문을 정리할 방침을 세웠다가 내부 임직원의 반발은 물론 대리점.하청업체의 항위시위로 곤욕을 치렀는가 하면, S그룹 한 계열사도 지난해말 특정 사업의 매각설이 보도되면서 대리점이 주문을 끊는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같은 부작용과 함께 현행 세법이나 관련제도도 '빅딜' 에는 맞지않게 돼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문호 (李文浩) LG회장실 사장은 "빅딜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제도는 그대로 두고 계획부터 제출하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며 "기업을 정리할 때는 세금이나 부채정리방법.자금확보 등 현실적 어려움이 많은데 이런 장애물을 먼저 치워줘야 거래가 이뤄질 수 있다" 고 밝혔다.

정치권이 빅딜을 포함한 계열사 정리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해 "얼버무리기식 개혁은 안된다" 고 비판한 것도 경제현실을 모르는데서 나온 발상이라는 게 재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섣부른 계열사 정리계획 발표로 모 (母) 기업까지 위험에 빠뜨린 대표적인 예가 동서증권" 이라며 "증권업계 4위였던 동서증권이 부도를 낸 것은 모기업인 극동건설이 동서증권 매각을 발표한 후 벌어진 고객예탁금 인출사태 때문이었다" 고 지적했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 진영도 이런 문제점을 의식, 22일 5대 그룹 기조실장 회의에서는 ▶빅딜에 걸림돌이 되는 제도는 서둘러 고치고 ▶정리대상 계열사나 사업부문도 비공개로 정부에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개발연구원 유승민 (劉承旻) 박사는 "금융산업 구조조정과 소액주주.채권자의 경영 감시.견제장치 마련, 총수와 친인척의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 부여 등 제도개혁이 대기업 개혁을 위해 훨씬 시급한 과제들" 이라며 "가시적 조치에만 치중하면 결국 대기업 개혁은 현실의 벽에 부닥쳐 또다시 표류할 수밖에 없을 것" 이라고 지적했다.

劉박사는 "대기업이 내놓은 계획이 미흡하다면 정부가 기대하는 수준까지 구조조정을 안하고는 못배기도록 제도를 고쳐 압박하는 것이 경제적 해법" 이라고 강조했다.

이원호·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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