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타자 겸 에이스’ 고교야구에선 옛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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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노준 SBS 야구 해설위원은 선린상고 재학 시절 투수 겸 타자로 활약했던 만능 플레이어였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와 이대호(롯데)도 마찬가지다. 추신수는 부산고 재학 시절, 이대호는 경남고 당시 투수와 타자로 맹활약했다.

김병현은 광주일고 2학년이던 1995년 청룡기 대회에서 투수로 나와 방어율 0.035를 기록하며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그러나 이듬해 대통령배 대회에선 안타를 9개나 기록하며 최다안타상을 받기도 했다. 마운드와 타석을 오가며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팀 승리의 주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요즘 고교 야구에선 삼진도 잡고, 안타도 때려내는 ‘원맨쇼’는 보기 힘든 풍경이 됐다. 올해 대통령배 8강에 진출한 팀 가운데 투수와 4번 타자를 겸한 선수는 야탑고의 배민관(18)이 유일하다.

마운드와 타석에서 맹활약하는 만능 선수들이 사라진 것은 대한야구협회가 2004년부터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때문이다. 선수 보호라는 명분에다 한 명의 선수라도 더 대학에 보내려는 고교 감독들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이 제도가 시행됐다.

지명타자 제도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고교 선수들이 많은 투구를 하는 것은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 더구나 재능이 있다고 해서 투수가 타자로도 뛰는 것은 선수 혹사”라며 지명타자 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이다.

상원고 박영진 감독도 “어린 나이에 많은 공을 던진 뒤 타석에 들어서면 팔 관절에 무리가 따르고, 부상 위험도 커진다. 지명타자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선수와 학부모들도 지명타자 제도에 호의적이다. 훈련 시간은 제한돼 있는데 던지기와 때리기 훈련을 모두 잘하려다 어느 쪽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상의 우려까지 있어 대부분의 투수는 타격을 꺼리고 있다. 그러나 한 프로팀 스카우트는 “고교 때까지는 마운드와 타석에서 기본기를 배워야 한다. 어린 나이에 한 가지 역할만 하면 반쪽 선수가 돼 버릴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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